나는 아이들이 4살 2살이 되고부터 다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새신자를 위한 주일 저녁 7시 예배에 다녔다. 그러나 ‘열린 새신자 예배’라는 이름과 달리 새신자 예배는 어린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나는 본당 예배를 거부 당한 후 자모실에서 주일 예배를 들었다. 자모실답게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소리지르고, 울고 몹시 소란스러웠다. 나는 아이들이 그렇게 사탕을 주지 않으면 때를 쓰고 심지어 원하는 장난감을 주지 않으면 드러 눕는 아이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못했다. 우리 아이는 마트와 서점의 놀잇감 앞에서 지체하다 아빠에게 멱살을 잡힌 후로 발에 모터가 달린 듯 빨라졌다. 아이가 느낀건 공포였으리라.
나는 그 후에도 여러번, 아니 자주 아이들의 눈빛에서 그날의 공포를 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을 느끼게 되었다.
물론 나는 저항했다. 어떻게 그 어린 아이가 장난감을 구경하다가 미처 따라오지 못했을망정 그아이의 멱살을 잡고 흔들 수 있는지, 어쩌면 그렇게 잔인 할 수 있는지 따졌다. 그러나 미안하다거나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거나 그런 말은 들을 수 없었다. 그 후에도 남편의 죽여버린 다는 협박은 수백번이고 나를 통해 또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되풀이 되었으며 그때 마다 들려온 변명은 그저 고등학교때 유행어였고 남자들은 다 그렇게 산다는 거였다.
나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견디기 위해 신앙에 의지했다. 성경을 세 번씩 읽었으며 찬양을 한 시간씩했다. 아이들이 잠들때도 어린이 성경 이야기를 틀어놓았고 찬양을 불러 주었으며 기도를 해주었다. 나는 비록 모태신앙이 아니었지만 그리고 시댁의 모태신앙인들은 형편없이 엉망이었지만 아이들이 믿음안에서 바르게 자라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와중에도 남편의 외도는 계속되었다. 그 사실을 시어머니는 알고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걔가 뭔가 부족한게 있으니까 그러겠지, 니가 더 잘해줘봐라 그러겠냐, 그리고 알고보면 교회다니는 남자들도 다 그러고 산다’ 그러시며 부부관계에 대해 캐물으며 간섭까지 하셨다. 나는 몹시 불쾌했지만 한편으로는 본인도 경험하셨으면서도 아들을 감싸는 시어머니를 불쌍히 여겼다. 교회에서는 물론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교회에서 열리는 부부학교에서는 남자들은 유혹에 약할 수밖에 없다는, 그렇게 지어졌다는, 그래서 남자가 원할 때 거부하면 안된다는 강의를 대놓고 했고, 외도는 여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식의, 예수님이 우리같은 죄인을 살리시고 용서해 주셨는데 그 쯤을 눈감아 주지 못하냐는 말도 이어졌다.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형제들은 마치 자기편을 얻은 듯 더욱 자신만만해 지고 든든해 졌지만 솔직히 나는 시무룩해지고 실망했다. ‘당해보라지. 그럼 여자가 바람피면 남편 탓인가, 남자도 당연히 용서하고 봐줄것인가’ 라는 반발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도 내가 신앙을 버린 때는 아니다. 나는 그 후에도 20년가까이 주일 예배를 나갔으며 기도 노트가 너덜너덜해 질때까지 하루 한시간씩 기도했으며 책도 기독교 서적만 읽었고 틈만나면 ‘다 내탓이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중얼거리며 회개하라는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남편의 외도에 관한 교회 자매님과 집사님과 권사님들의 충고는 어쩌면 그렇게 다들 똑같았는지 마치 함께 모여 입을 맞춘 듯 하였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남편에게 매일 진수성찬을 차려주고 더 잘 섬기라는, 그러면 남편이 가정으로 돌아 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순진했던 나는 정말 그렇게 했다. 요리책을 열권이나 샀고 그 책들이 너덜너덜해 질때까지 정독했다. 하나하나 요리를 하면서 비슷한 요리들의 장점을 포스트잇에 요약해 덕지덕지 붙였으며 할줄 아는 요리는 수백가지로 늘어났으며 자신있는 요리는 수십가지로 늘어났다. 남편은 특히 제육볶음과 고추잡채를 좋아했는데 자신이 별로인 요리를 한 날은 트집을 잡아 화를 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 인색한 남편도 친구에게 내 요리실력을 자랑할 정도의 경지까지 나는 올랐고 그런 노력으로 여성편력이 있는 남자를 가정에 묶어둘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도 함께 깨달았다.
나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나에게 그런 충고를 한 몇몇 자매들도 나와 같거나 비슷한 일을 겪었으며 그중 한 자매는 남편 목을 졸랐고, 다른 한 자매는 조명을 깨고 깨진 유리로 손목을 그었으며 나머지 한 자매는 칼을 들었다는 사실을. 나는 남편에게 애원했다. 이제 아이들도 커가는데 그만하면 안되겠냐고, 설득과 당부와 분노 사이를 오가며 나는 차츰 지쳐갔고, 그릇된 교회의 가르침은 나를 성병 환자로 만들었다. 남편방에서 청소하다 발견한 비아그라, 부부관계 도중 베개로 내 얼굴을 가리고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던 남편, 샤워하고 나온 내게서 냄새가 난다고 다시씻고오라고 명령하던 남편, 화가 나면 내 뺨을 때리고 자신의 체면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나를 밀치고 쓰러진 내얼굴을 발로 밟던 남편, 여자로 태어나 더 이상 수치스러울 수 없을만큼 나는 모든 일을 당하고 나서야 조금씩 이성을 잃어갔다. 무엇보다 미칠 것 같았던건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없었던 탓이었다. 남편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같았지만 무슨 이유로 터지는지는 알 수 없는 폭탄이었다. 어느날은 내가 자신이 좋아하는 커피를 실수로 쏟아서, 어느날은 사라는 물건을 나만 사서, 어느날은 치킨을 두 마리가 아닌 한 마리만 시켜서 어느날은 아이가 짬뽕 한그릇을 혼자 다 먹는데 흐뭇하게 지켜만 보고 있었다는 이유로, 어느날은 티비에 나온 닭꼬치를 먹으러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는 아이들 앞에서 미친년이 되고 병신이 되어야 했다. 나는 그런일들을 당하고도 몇시간씩 삐져 있다거나 말을 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법이 없었다. 별일 아닌 것처럼 또 밥을 차리고 아이들을 챙기고 청소를 했다. 고통스러웠지만 나는 아이들이 그 불편한 분위기와 공기에서 빨리 벗어나길 바랬다. 그것이 아이들을 병들게 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나는 말씀을 들으러 매주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아이들은 조금씩 자라 어린이 예배에 참석했다. 남편은 교회를 가긴 했지만 목사님의 말씀을 자주 비판했고 일대일 양육자반을 할때는 담당목사님과 언쟁을 벌였고 자신이 듣기 좋은 설교를 들은 날은 기분이 좋았고 이를테면 그렇게 살지말라는 설교에는 대놓고 거북한 티를 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이미 사함 받은 죄, 그러므로 육신이 죄를 지어도 얼마든지 회개하고 천국갈 수 있다는 설교는 매우 좋아했는데 그렇게 교회에서 면죄부를 얻은 남편은 점점 더 당당해졌고 나는 점점더 초라해 졌다. 나는 내심 교회가 남편을 말려주기를,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이끌어 주기를 기대했지만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매주 금요일 참석했던 여섯가정 열두명이 모이는 순예배에서조차 남편은 나와 아이들의 신앙심을 더욱 키워주기 위해 도구로 선택된 방황하는 불쌍한 어린양으로 통했다. 나는 말을 할줄 모르는 벙어리 같은 심정으로 그 자리에 앉아 울지도 웃지만 못하는 바보같은 말들만 늘어놓으며 오늘은 무슨말을 듣게 될까 공포에 떨었다.
어떤날은 상담사로 일하시는 권찰님께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나는 그만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어 녹아 없어져 버리고 싶었다. ‘부부 상담을 해보면 절대 한쪽만의 잘못인 경우는 없다고, 절대 그냥 바람피는게 아니라고, 다 이유가 있다’고, 이미 한껏 마음이 상해있던 그때의 나는 권찰님의 충고를 나를 위한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수도 없이 들었던 말들, 자매님 회개하세요 돕는 베필이 되어서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남편 미워하고 의심하고 방황하게 만든 죄가 큽니다. 그런대도 하나님께서 참으시고 기회를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럴때도 나는 정말이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었다. 아니 차라리 산속의 절로 들어가 다시는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런말들을 듣는 동안 남편은 과연 어떤 말들을 들었을까? 남편은 당연히 우쭈쭈 해주는 자리가 아니면,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자리가 아니면 참석하지 않았고 교회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그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도무지 무엇 때문인지 그의 비위 맞추기에 바빴다. 힘을 얻은 남편은 집에서 더욱 자주 ‘그것봐 교회에서 뭐라그래? 목사님이 권사님들이 뭐라그래? 니 잘못이라잖아? 니 잘못이야’ 그렇게 말하며 남편은 웃었다. 마치 내가 그렇게 바라던 든든한 내편이라도 만난것처럼.
나는 교회안에서도 점점 외로워져갔다.
부부학교에서 받았던 상담과 교회 지하 상담실에서 받았던 상담과정은 하나도, 정말이지 전혀 내 심리적 상태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그 모든 과정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상처로 남아있다. 부부학교는 몇몇 화목한 가정도 있었지만 대부분 문에있는 가정들의 집합소 같았다. 낮에는 강의를 듣고 밤에는 자매들끼리 거의 밤을 세워 자신들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자매들의 이야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는데 다들 나보다는 착하고 훌륭한 형제들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정도 쯤이야 나는 그곳에 있는 모든 자매들이 부러웠다. 그 집단또한 어떤 일이 있다고 해도 이혼은 말리는 단체였는데 내 이야기를 하자 한 자매님이 말했다. ‘자매는 더 살으라고 말을 못하겠다’ 그 솔직한 말 한마디가 나의 숨구멍을 틔워주었고 나를 그 집단에 계속 출석하게 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그들이 쳐놓은 방어막, 더 이상은 알고싶지 않다 그래도 너를 도울수 없다,는 그들의 안전막안으로 나는 침입할 수 없었고 나는 내 이야기를 3분의 1도 다 털어놓지 못했다. 대신 나를 미국에서 상담 공부를 하고 왔다는 한 자매님께 보냈는데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남편이 어떤 가면을 쓰고 있는지 자신은 세상 모든 사람을 속일수 있다고 하며 나를 협박하는지 털어놓았다. 나의 상담 다음에는 남편의 상담이 이어졌는데 드디어 내말을 들어주는 내편을 만났다는 순진한 나의 착각과는 달리 상담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남편의 래퍼토리는 솔직히 뻔한 것이었다. 자신은 방치되어 자랐으며 어머니의 부재로 늘 외로웠으며 그래서 일찍 결혼했으나 나는 그의 마음의 허기를 채워줄 여자가 되지 못하며 그래서 자신은 방황하고 있지만 곧 가정으로 돌아갈거라는. 그의 이야기는 상담사의 심금을 울렸는지 상담사는 남편과 나 모두를 불러다 놓고 내가 짐작한 뻔한 이야기를 했으며 마지막에 헤어질때는 나와는 악수를 남편은 따뜻하게 안아 등을 토닥여 주는 것으로 나를 황당하게 했다. 다시 자신의 편을 얻은 남편은 물론 매우 흐뭇해 했다. 그 후 남편은 나를 때려놓고 스스로도 통제가 안되는 자신이 수습이 되지 않았는지 의외로 교회에 상담을 요청했다. 그 때 만난 상담사님 덕분에 나는 또 잠시 희망을 가졌는데 그분께서는 첫날부터 외도하고 폭력쓰는 남자들을 잘 다루는 능력있는 자신의 사수를 자랑했다. 그런 분별력있는 상담사님을 만났으니 이제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도 해주셨다. 그렇게 속고도 나는 기대를 했다. 이번에는 정말 다르지 않을까? 드디어 내 기도가 응답되는 것인가? 드디어 우리 아이들도 달라진 아빠를 보며 유전자까지도 바꾸신다는 예수님을 믿고 평온한 가정에서 안전한 유년기를 보낼 수 있게 될까? 그러나 열 번의 상담을 거치며 남편의 자아는 더욱 강해지는 것 같았다. 남편은 더욱 자기자신을 불쌍히 여기게 되었으며 역시 자신은 피해자이며 그러니 좀더 방황해도 된다는 확고한 결론에 이른 듯 보였다.
희망과 절망을 오락가락하며 나는 남편의 외도를 처음 알았을 때 보다 아무것도 해보지 않았던 그 때 보다 점차 더 고통스러워져갔다.
그때 내가 상담실에서 한 얘기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바닥으로 떨어졌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나, 그들은 혹시 듣지 못한게 아닐까, 절박한 내 언어는 그들이 감당하기에 너무 벅찬 것이어서 무의식적으로 아니 어쩌면 의도적으로 그것도 아니면 선택적으로 그들을 일시적 그귀머거리 상태로 만든게 아닐까. 나는 분명 말했었다. 남편은 던지고 부수며 욕하고 때리며 그 행동은 내가 그를 섬길수록 더 강화되는 것 같다고,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다고, 나를 도와달라고, 그리고 또 말했었다. 미처 로그아웃이 되지 않은 남편의 이메일에서 모텔 이름과 룸 넘버를 보았노라고, ‘친애하는 으로 시작되는 숱한 편지들을 보았노라고, 나는 보고도 믿을수가 없었노라고. 나에게 숱하게 발언되었던 ’재수없는‘이 아닌 ’친애하는‘으로 시작되는 편지가 겨울 패딩하나 없이 강추위에 떨며 겨울을 나던 내가 한번도 들어본적없는, 날씨가 추우니 감기 걸리지 않게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는 말로 끝나고 있었다고. 그러나 왜 그들은 남편 비위 맞추기에 급급했을까, 왜 그렇게 하는건 남편이 그래도 계속 교회를 나오게 하려는 유인책이었다고 설명했을까. 나는 지금도 알수 없다. 그들은 나를 두 번 죽였다.
그러나 시간이 더 흐르고 나서야 믿음으로 새워졌다는 그들 가정의 울타리 또한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허약한 것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재산 때문에 싸우고 별거했고, 누군가는 도박 때문에 빚을지고 도망다니고 있었고, 누군가는 아내가 바람이나 집을 나갔고, 누군가는 지속되는 사업실패로 자살을 기도했다.
어느날 부부학교를 함께 했던 한 자매에게 전화가 왔다. 가끔 안부는 주고 받았지만 거의 10년만의 통화였다. 이혼소송을 준비중이며 3년가까이 별거중이라는, 남편이 목을 졸랐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으며 시댁은 한편이며 아들에게는 엄마탓으로 몰고 갔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신의 가정이 깨어지게 되어서야 비로소 너도 그만 살라는 충고가 이어졌는데 사람은 변하지 않으며 그렇게 살다 너 죽는다는 솔직한 판단과 함께였다. 그러나 그 자매는 결국 이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가 원하는걸 얻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 알게되었다. 그 자매가 궁금한건 내 이혼 사유가 아니었다. 대놓고 증여받은 재산은 어떻게 되는지 처분할 수 있는지 그런 방법이 있는지 물었고 그리고 내가 아는 사실과는 다르게 그동안 자신의 남편도 밖에서 고생이 많았다며 감싸고 돌았는데 나는 차마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 집 형제는 집을 나가 있는 동안 해외여행을 하고, 자매가 성격이 별나서 힘들었다는 얘기를 하고 다녔으며, 거의 20년을 살던 목동에서 강남으로 이사를 한 이유도 너무 싸우고 살아 동네 챙피해서 였고, 자매가 자신의 명의로 된 집을 탐내서 싸웠으며 여자가 돈욕심이 너무 많다는 얘기를 하고 다녔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야기를 자매에게 하지 않았고, 이제 행복하게 사시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짧은 카톡을 하나 받았는데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네 라는 말이었다.
도움을 요청했는데 다들 관심사는 따로 있네요
어디에 얼마짜리 집이 있고 어느 아파트가 지어지고 현재 거주하는 집은 시세가 얼마이며 재산 목록이 뭔지, 재산 분할은 얼마나 받는지에 더 관심이 많네요 그리고 교회다니는 자매들이더하네요 저도 마음이 아프네요
나는 이렇게 답장을 썼다가 그냥 지웠다.
내가 이혼소송을 하게 되고 통장에 잔고가 점점 줄어들고 생활이 어렵게 되어 도움을 요청했을 때, 자존심따윈 다 접어놓고 혹시나 아이들 밥을 굶기게 될까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어렵게 어렵게 꾹꾹 눌러 구조를 요청하는 글을 써 보냈지만, 그런 내 마음은 한스푼도 담기지 않았는지 나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먼저 내가 결혼한 교회의 담임 목사님에게 보냈고, 다음에는 나를 형수님이라 부르던 이제는 어엿한 목사님이 된 남편의 군대 동기였던 형제에게 보냈고, 나름 경제적으로 윤택하다고 알고 있는 세 자매님에게 보냈고, 마지막으로 내 생일에 식사를 무료로 제공해줬던 유명한 식당과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님에게 보냈다. 그러나 돈 10만원도, 하물며 흔하디 흔한 힘내라는 짧은 한마디의 말조차도 나는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아무런 답도 받지 못하고 나는 모두에게 외면당했다. 내 사정을 알고 나면 누군가 한사람쯤은 나를 도와 주리라 생각했던 내 순진함은 어리석음이 되어 남았다. 아..남편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여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불행한 사람에게 불행을 한스푼쯤 더 얹는 일은 마치 아무것도 아닌일처럼 보인다. 자비란 없다.
그리고 나는 이제 교회를 그만 떠나야 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일을 겪고도 또 교회 지인들의 위선을 목격하고도 하나님과 완전히 이별하지 못했던 나는 여전히 설거지를 하며 찬양을 했고,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에 우두커니 일어나 앉아, 또는 걸으며 틈틈이 기도를 했다. 그리고 자주 그날을 떠올렸다. 순장님과 순모님이 예언의 은사가 있다는 권사님을 모시고 가정방문을 왔던 날이었다. 딸아이는 우울증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있었고 나는 자책을 많이 했고 남편은 모두 내 탓을 하며 기름을 부었다. 죽음의 유혹앞에 선 자식을 보는 고통은 대단했고 나는 잠들지 못하거나 한밤중에 깨어 아이의 생사를 확인하던 날들이었다. 권사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주 예수를 믿으라’ 새신자에게나 할 법한 주문같은 기도에 나는 조금 의아했다 그리고 마지막 말씀에 나는 그만 좌절했다. 아이가 나 때문에 아프다는 것이다. 내가 믿음이 적어서 나의 믿음을 키우기 위해 아이가 고생하고 있다는 거였다. ‘아..이것은 언젠가 들어본 말이다 ‘가정마다 애물단지가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나를 믿음의 길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라는 그러니 그를 잘 대접해주라’는 이야기였다. 아 그렇구나 또 나구나 남편이 바람을 피는 것도 가정에서만 그렇게 악을 쓰고 막말을 하고 욕을 해대는 것도, 아이들이 아픈것도 다 나때문이구나 나는 이제 차라리 미치고 싶었다. 미쳐서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이 차라리 부러웠다. 하필 이때에, 몸은 견딜수 없이 아프고 마음은 하염없이 무너져 가는 이때에..
그리고 나는 저항했다. 울부짖었다. 그분들이 그만 돌아가 주기를 바랬다. 아, 나는 서러웠다. 그리고 겨우 붙잡고 있던 신앙의 끈을 놓아버렸다. 내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내 믿음을 보이면 되겠습니까. 차라리 나를 죽이세요 내가 언제 살겠다고 했습니까. 어차피 내 운명이라는게 당신의 자비안에 갇힌 것이 아닙니까. 나는 사람이 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제대로 된 해명도 못해보고 죽어버리는지 알 것 같았다. 처방받은 한 달치의 수면제를 모두 먹고 하염없이 잠으로 빠져들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