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다른이름

by 유나

나는 어쩌다보니 남편이 학교를 다니던 춘천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나에 대한 남편의 집착은 대단했고 시어머니는 남편을 이기지 못했다. 사업하느라 제때 밥을 먹이지 못했다는 일종의 부채감에 시달렸던 시어머니는 군대를 제대 하자마자 결혼하겠다는 어린 아들을 말리다 지쳤고 아무도 모르게 방 하나를 얻어주며 얼마간의 돈과 콘돔을 사다 넣어 주는 것으로 묵인과 용인을 함께 했다. 그때는 IMF가 시작된 때로 나의 친정은 기울기 시작했고 그 사실은 나를 이런 상황 가운데로 밀어넣는데 어떤 기여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나는 어렸고 순진했고 무모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스물셋의 나이에 나를 사랑한다는, 내가 없으면 안된다는, 빨리 아이를 낳고 안정된 삶을 살자는 그의 요구를 그렇게 순순히 받아들일수는 없없을 것이다.


그렇게 가전도 없고 가구도 없지만 콘돔은 있는 결혼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사실 미션스쿨을 다니던 당시 순결 서약을 한 몸이었고 열일곱에 수녀가 되겠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으며 남자에는 당연히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남편은 이미, 스무살이 되자마자 순결을 잃은 몸이었다. 첫 상대는 교회 누나였고 두 번째는 유럽 단체여행 중 만난 외국인 여자애였으며 세 번째도 있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네 번째도 있었다. 그러나 남편은 그사실을 철저히 숨긴채 여자는 나 뿐이고 내가 처음인 것처럼 연기도 했다.


남편이 연기한 남자는 첫사랑에 빠져 그 여자밖에 모르는 지고지순한 한 어린 남자였는데 그 남자는 교회를 다녔고, 편지에 성경 말씀을 적었고, 말을 천천히 했으며, 클래식을 사랑했고, 나처럼 모네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가 다 들키지 않았던건 아니었다. 조금 이상한 면은 있었다. 음식을 시킬 때 자기가 먹고 싶은걸 두 개 시키거나 내가 고르면 그건 맛이 없다고 다른걸 먹자고 했으며, 무더위에 선풍기 바람은 자신에게만 향하게 했고, 운전을 험하게 했으며, 애버랜드 귀신의 집에서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알바생을 머리로 들이받아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이페츠를 몰랐다. 고흐의 아몬드 꽃 나무도 못알아봤다. 당연히 알리사가 누군지 몰랐고 공지영은 혐오했다.


그래도 나는 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쩌면 그보다 나 자신을 믿었던 것 같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를 믿었고, 조금씩 이루고 성장해가는 재미가 있을거라 생각했고, 무엇보다 고물고물한 아기를 낳아 행복하게 살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 얼마나 무참히 깨질 허무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기 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간은 잔인하게 내 등을 떠밀었고 눈먼 사랑의 유효기간은 끝났으며 그는 실체를 과감 없이 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일은 불행히도 나의 임신과 함께 시작되었다. 완벽한 소유로 애걸은 끝났고 복종이 요구되었다.


임신을 하자마자 나는 방치되었다. 남편은 자주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시어머니는 반찬 한 번 해주지 않았고 과일하나 사다주지 않았다. 서울에 돈도 친구도 없었던 난 계란과 생두부를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남편의 갑질만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시아버지는 당시 아직 학생이었던 남편에게 매달 150만원씩을 남편에게 1년간 주겠다고 하며 주는 내내 아니, 평생을 생색을 냈으며, 시어머니는 자신의 집에서 밥을 하지 않고 청소를 하지 않으며 나에게 쌀 벌레가 가득한 쌀을 씻게 하며 반찬을 하도록 했다. 나는 제 손으로 속옷도 빨아 입지 않던 시누이의 팬티를 개며 두 집 살림을 했다. 그래도 나는 별다른 불평을 할 줄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때도 도망보다 순응에 빨랐던 것 같다.


다만 나의 마지막 공주 역할이 남아있었는데, 그것은 결혼식이었다. 나의 임신과 함께 안 그래도 평소에 눈에 차지 않던 아들에 대한 시아버지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그 분노는 상견례 자리에까지 이어졌다. 당황은 여자쪽 부모가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았을텐데 시아버지는 노골적으로 심술을 부렸다. 그날의 만남은 하필 횟집에서 이루어졌고 곱게 발라진채 죽은 생선은 꼭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극히 개인적이었던 일이 까발려져 수치심으로 물들어야 했으며 나는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앉아 시아버지의 앞으로 어쩔꺼냐 어떻게 살꺼냐에 대한 물음에 답해야 했다. 나는 철없고 생각없고 무책임한 여자가 되어있었으며 내가 동정녀 마리아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 남편은 없었다. 그날따라 친정엄마는 말이 많았으며 시부모에게 음식을 들것을 자주 권했고 그것으로 자세를 낮추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돋보였다. 나를 찾아와 남편을 받아 주기를 애걸했던 시어머니는 그날따라 자신은 시아버지의 의견에 따른다는 의외의 견해를 내놓았는데 후일에서야 그 대답에 만족한 시아버지에게 그렇게 말한것에 대한 칭찬을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난후 그들 역시 결혼식 전에 남편을 임신했으며 배가 부른채 결혼식을 올렸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아버지의 하회와 같은 은혜로 결혼식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거기에는 시아버지의 사회적 체면과 금전적 이득이 고려되었는데 제사를 지내며 음주가무를 즐기던 집안의 선택이라고는 아무도 믿지 못하게 교회에서 경건하게 이루어졌다. 예상대로 축의금은 1억이 훨씬 넘게 들어왔다고 했다. 그것으로 결혼식과 다 무너져 가는 전셋집을 얻은 금액은 충당되었다.


신기하고도 이상한 일은 결혼식으로 남편은 어린나이에 책임감 있는 남자가 되었고 나는 같은 나이에 철없고 생각없는 여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평가는 결혼 후에도 이어졌는데 남편의 외도는 아직 어려서 무거운 책임감으로 잠시 일탈한 것으로 치부되었고 나는 그 나이에 철없는 선택을 했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한마디로 내가 초래한 당연한 결과로 여겨졌다. 실제로 시아버지는 ‘누가 결혼 하라고 했냐, 니가 선택한거 아니냐, 책임도 니가 져야지’ 라는 말을 자주 했으며 가만있었으면 더 좋은데 장가를 보내 줬을 텐데 하며 노골적으로 나를 무시했다.


제법 높은 경지의 이해심은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요구되었다. 아이를 낳고 나는 산후 조리원은커녕 집에서도 산후 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잠이 없던 아이와 밤을 새며 집안 살림까지 해내야 했다. 지방대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었던 남편은 학교를 핑계로 주말에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고된 육아로 몸무게가 42kg이 되고 머리카락이 한움쿰씩 빠지면서도 나는 단 한번도 그 누구로부터 아이를 잠시 봐줄테니 좀 쉬거나 잠을 자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렇게 두어달을 보냈고 딸아이가 100일도 되기 전 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신혼살림을 정리하던날 남편은 컴퓨터를 놓는 위치를 두고 언성을 높였는데 그것은 내가 문이 열리면 컴퓨터 화면이 보이는 위치에 책상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녕 몰랐다. 그것이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를 문제가 될줄은. 22평 아파트에 방은 3개였으나 하나는 방 구실을 못할만큼 작았고 하나는 안방으로 옷장과 침대를 놓고 나니 끝이었고 옆에 붙어있던 나머지 방은 남편의 방이 되었는데, 정리라고는 하지 않던 남편이 갑자기 대노하고 나선대는 다른 이유가 있었던걸 나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남편에게는 나에게 들켜선 안될 은밀한 취미 생활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집에서 산다는 일은 그 비밀을 오래 지켜주지 못했다. 힘든 육아 중에 집에 있는 시간이 얼마되지 않았던 남편은 그 시간마저도 주로 새벽까지 혼자 영화를 보거나 과제를 한다는 핑계로 방문을 닫고 들어가 방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나는 그런 남편을 위해 식사 준비를 했다. 정말 식사 준비까지 했다. 그날은 남편이 유난히 바쁜 듯 하여 김밥을 말았고 그것을 접시에 담아 남편의 방문을 열었다. 방안은 이상한 열기로 가득했는데 한겨울에 난방이 잘 되지 않던 50년된 낡은 집에서 남편은 컴퓨터 앞에 나체로 앉아 있었다. 남편은 화들짝 놀라며 화면을 가렸지만 이미 나는 화면 안에서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본 후였다. 그 안에는 남편과 같은 몰골을 한 나체의 여자가 누워 있었다.


나는 김밥을 내려놓았던가 내려놓지 못했던가. 그냥 돌아서서 문을 닫고 나왔던 기억만이 남아있다. 안방에서는 어린 아기가 울고 있었다.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평정심을 되찾아야했다. 아이를 안고 젖을 물리며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던 것 같다. 겨우 아이를 재우고 나는 집앞 편의점에 2월의 남은 추위에 잠옷바람으로 미친년처럼 뛰어갔다. 겨우 맥주 두 캔을 산 나는 빛의 속도로 다시 집으로 돌아와 남편 앞에 앉았다. 맥주 한 캔을 남편에게 내밀며 대화를 시도했다. 나는 말했다. 내가 보았다. 음란 채팅을 하는 것을. 그 여자와 밖에서도 만나는거냐.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뭘 그런걸 묻느냐는 듯이. ‘그냥 호기심에 하는거야. 난 원래 결혼전에도 이렇게 살았어. 넌 남자 형제가 없어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다른 남자 애들도 다 그렇게 살아 신경쓰지마.’


나는 바보처럼 허망해진 얼굴로 남편을 쳐다 보았다. 따지고 싶었다 똑같이 살거면 결혼은 왜했냐고 지금 내가 얼마나 힘든 시기를 홀로 보내고 있는지 아느냐고. 그러나 그것은 언어가 되어 입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나는 두고두고 그날 하지 못한 말을 머릿속으로 반복하게 되는 벌을 받았다.


대신 나는 부탁을 했는데 이제 아이도 태어났고 결혼도 했으니 이젠 그런 취미생활은 그만 둬 주길 바란다는 애처로운 한 마디였다. 한번에 알겠다고 대답하지 않는 남편을 등지고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한 얘기를 듣게 될까봐 두려워서였던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등 뒤에서 화살이 하나 날아와 꽂혔는데 ‘그 정도도 이해 못하는 속 좁은 여자였냐 나는 쿨한 여자가 좋다.’ 라는 말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남자의 사생활을 이해하지 못하는 쿨하지 못하고 속까지 좁은 여자가 되었다. 억울했지만 나는 반격하지 못했다 이미 지쳐있던 내게는 맞은 화살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고 불과 몇 일 뒤 여전히 잠들지 못하던 나는 새벽 2시에 계속해서 울려대던 남편의 전화를 받게 된다. 전화를 건 상대는 끈질겼는데 마치 받을 때까지 한다는 심산인 것 같았다. 전화가 일곱 번째쯤 울릴 때 혹시 급한 일은 아닐까 술에 취해 뻗은 남편을 깨워야 하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나는 그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열자마자 술 취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다른 말은 다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내가 잊지 못할 한마디를 남겼다. ‘어젯밤에 좋았다. 그런데 모텔은 후졌다 그런데서 뒹굴고 싶지않다, 다음에는 좀 더 좋은데를 가자.’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상하게도 별로 놀랍지 않았다. 아직 핏덩이 같은 딸아이를 두고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데도 놀라울 만큼 나는 차분했다. 어쩌면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충격은 훨씬 더 나중에 느닷없이 왔는데 그때는 둘째까지 낳고 나서였다. 늘 나를 못마땅해 하던 시아버지는 모처럼 기분이 좋았는데 그건 내가 4대 독자를 낳은 까닭이었다. 부끄럽고 못마땅한 일이었던 첫아이 임신과는 달리 딸을 낳자마자 아이를 또 가질것이 요구되었는데 손이 귀한 집안에 시집을 왔으니 그것은 당연한 요구로 주어졌다. 그러나 남편은 첫 딸이후 아이를 더 이상 바라지 않았고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고민하지 않았다. 내가 아이가 좋았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그 고생을 하고도 셋은 낳고 싶었고 성별은 상관없었다. 그냥 외롭고 고단한 내 인생에 친구같은 아이들이 갖고 싶었다. 그 아이들이 자라 함께 웃고 소풍을 갈 생각을 하며 나는 그때 챙겨갈 도시락 메뉴까지 상상하며 혼자 즐거워했다. 아들이 태어났지만 남편은 여전히 2박3일씩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날에는 외박 후 본가에 가서 태연히 고기를 구워먹고 영화를 보며 놀고 있었다. 나의 독박 육아는 다시 시작되었다. 아이는 아토피가 있었고 밤새 긁는 아이의 얼굴을 녹차물로 식히고 연고를 바르며 나는 다시 잠을 잘 수 없었다. 스트레스로 머리가 한움큼씩 빠졌으며 약해진 면역탓에 피부병까지 얻었다. 그 와중에도 시아버지는 가족사진에 집착했는데, 그 몰골을 한 나에게 매년 가족사진찍기를 강요했다. 사진 찍는 날짜는 당일 아침에 알았으며 옷과 메이크업을 준비한 시누이들과 달리 나는 발진이 난 피부 부위를 겨우 가릴만한 희안한 옷을 입고 초최한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섰다. 당연히 나는 결정권이 없었고 최종 인화된 사진은 그들이 잘나온 사진이었다. 그 사진들은 시댁 거실에 전시되었는데 나는 그것을 볼때마다 수치심을 느꼈다.


시아버지와 남편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비단 외도와 와이프에게 막말을 잘한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시아버지는 시어머니를, 또 나를 꺾어 놓고 싶어했고 남편 또한 그러했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자식도 잘키우고 집안일도 잘해야 함은 물론 그들에게 순종적이고 무엇보다 그들을 칭송해 높여줘야 했다. 자수성가한 시아버지는 내가 한 때 부잣집 딸이었다 형편이 어려워진걸 알고 망한 집안의 딸 컨셉에 맞게 알아서 자세를 낮춰주길 바랬다. 남편은 내가 어쩌다가 읽은 책 이야기라도 하면 듣기 싫다고 잘난척하냐고 소릴 질렀다. 한때 문학소녀였던 나는 고전 문학을 즐겨 읽었고 결혼 후에도 육아서나 에세이, 소설 가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대로 하루에 거의 한 권씩 책을 읽었다. 책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남편을 시계를 쳐다보며 기다리지 않아도 되게 해주었고, 내게 유일한 위로가 되어 주었다. 책이 없었다면 나는 그 시간들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그마저도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나는 책을 읽다가도 남편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얼른 덮어서 숨겨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아이들이 한 번도 깨지않고 밤새 잠을 자고 이제 한숨 돌릴만한 상태가 되었을때, 나는 다시 남편의 외도를 알게되었다. 로그아웃이 미처 되지 않은 남편의 이메일을 통해서였다. 수백통의 이메일은 ‘친애하는 아람에게’로 시작하고 있었다. 어떤 이메일에는 모텔 이름과 룸 넘버가 적혀있었고 어떤 이메일에는 아프면 쉬어야 한다, 추운데 옷을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는 메시지가 들어있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정말이지 남편에게 한 번도 들어본적 없는 다정한 말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물었을때 남편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친구 사이에 그 정도 편지도 못쓰냐고 호텔에서 만난건 맞지만 아무일도 없었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비록 방황하고 있긴 하지만 진짜 사랑하는 여자는 너 하나 뿐이다, 그러니 기다리라. 나는 순진했던 걸까,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까. 그냥 그렇게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사실 알고 있었다. 사랑에 다른 이름은 없음을. 사랑은 그냥 사랑이어야 했다.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바람을 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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