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혼결심과 소송진행 과정을 한 권사님께 알렸는데 그분은 내게 각별한 분이셨다. 우울증의 늪에서 아들을 잃은 큰 아픔을 간직했지만 유머와 소녀같은 매력을 가진 분이셨다. 꽃이 흐드러 지게 핀 따뜻하고 빛나는 계절에 아들을 보낸 그 분은 그 시기가 되면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앓아 누울정도로 힘들어 하셨지만 그럼에도 믿음을 잃지 않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시는 존경스러운 분이셨다.
그분은 이혼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소송도 잘 시작했다고 꼭 이기도록 그것도 크게 이기도록 기도하겠다고 해주셨다. 아이들의 우울증이 어디서부터 기인되었는지 그분은 알고 계셨고 그 사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해결책이라는 것도 이해하고 계셨다. 친정에서 조차 반대했던 나의 이혼에 아군은 그분 한분 뿐 이었지만 그분의 위로와 격려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나는 그분과 수많은 카톡을 주고 받았는데 거기엔 자녀를 향한 애끓는 심경과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수 있는 학대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느날 내가 보냈던 답장이다.
마음이 아픕니다 권사님..
찬란한 봄 앞에서 아직 차가운 겨울이었을 그 마음이 조금이나마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딸아아가 많이 힘들었다는걸 알고 아이의 시선으로 지난 시간들을 따라가 보는 일을 자주 했습니다. 그 기억들 속에서 어찌나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던지 하염없이 무너지는 마음에 저는 몇 번이고 길을 잃었고 그 마음을 아이앞에서는 티내지 않으려고 힘겹게 붙잡아야 했습니다. 말을 꺼내면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시간들이 그렇게 겨우겨우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마음은 꽁꽁 언 겨울인데 어쩌자고 저는 봄인것만 같은 헛된 웃음을 흘리고 있었는지 그것이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 믿었는지, 이제와 참담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저도 이럴진데 따뜻한 봄의 문턱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대는 꽃 앞에서 권사님 마음이 슬픈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권사님 마음을 다 알진 못해도 조금은 알 것 같지만 그 말조차 조심스럽습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슬퍼하시고 기운 내시면 좋겠습니다. 이런 부족한 말로 밖에 표현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천만번의 후회로도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아이들의 행복하고 안전해야될 유년기를 되찾아 줄 수 없었다. 아이들과 나 사이에는 애뜻함과 연민과 전쟁을 함께 겪은 사람들에게서나 보일만한 동지애가 있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은 건강한 것만은 아니었다.
왜 없었을까, 어떻게 없을 수 있을까, 나에 대한 원망이.
이혼하지도 않고 별거하지도 않고 갖은 욕설과 막말에도 또 별일아닌것처럼 같이 밥을 먹고 여행을 가고 용서까지 하라고 말했던 엄마를 보며 느꼈을 무력함, 그것이 아이들을 고독하게 했고 병들게 했음을 나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그러나 매우 아프게 깨달아야했다. 살려야 했다 아이들을, 내 생명을 백만번 내놓더라도 무조건 살리고 봐야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정신과에 다니며 그토록 아끼며 모아왔던 8천만원짜리 적금통장을 해지했다. 우리는 쇼핑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고 여행을 갔다. 아들에게는 값비싼 천채 망원경을 사주었고 딸에게는 좋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사주었다. 그들이 좋아하는 활동을 하며 생기를 찾아가길 바랬다. 그런 나를 남편은 비난했고 한심해 했지만 나는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살리고 있던 중이었다. 물론 돈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다. 나는 친정에서 5천 만원을 빌렸다. 그걸로 병원비를 충당했고, 딸아이를 분가 시켰다. 그러고도 나는 2천만원의 대출을 받았다. 일정한 직업이 없으니 신용대출이 되지않았고 카드대출을 받았다. 나는 금융에는 무지했고 많은 이자를 감당하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남편은 세상에 태어나 들을 수 있는 모든 욕을 해댔다. 나는 미친년에서 미친새끼가 되었고, 병신에서 씨발년이 되었다. 뭐가 됐든 어차피 다 똑같았다. 나는 조금씩 마음에서 남편을 버리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만하라고 말했던건 그를 위해서였고 그냥 뒀던건 복수였던 것 같다. 그가 그대로 자신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폭주해 파멸한대도 나는 더 이상 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내가 이미 너무 많이 지쳐있었다.
딸아이는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다정했다. 한 살때부터 동화책을 여러 권 반복해서 읽어주었더니 두 살때는 줄줄 꿰고 다녔다. 4살이 되니 한번도 가르친적없는 한글로 절로 깨지고 뭐든 직접해보고 실험하기를 좋아해 나는 사실 아들이 아닌 딸이 과학자가 될줄 알았다. 낮에는 잘 눕지. 않던 내가 어느날 집안일에 지쳐 잠시 거실바닥에 누워 쉬고 있으면 고사리갚은 손으로 이불을 가져다 덮어주었다. 어쩌다 바다에 놀러갔을땐 모래에 엄마 하트를 그려주는 스윗한 아이였다. 우리는 자주 편지를 주고 받았다. 편지에는 엄마 덕분에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신앙고백도 있었고, 애뜻한 마음과 소심한 걱정도 담겼지만 가끔은 서운했던 일도 적혔다. 그럴때면 나는 아이들이 잠든 새벽 곧장 답장을 쓰곤했다. 그럴때면 각종 하트모양 스티커를 아끼지 않고 붙였다. 아이는 절대 음감을 가졌고 그림도 잘 그렸고 글도 잘썼다. 학원이라고는 동네 문화 센터에서 열리던 한달에 4만원하는 피아노 학원에 전부였는데도 아이는 듣는 음계를 그대로 쳐냈다. 학교 방과후 수업에서 바이올린과 플루트도 배웠다. 나는 나중에 아이가 우울증에 걸리고서야 음악을 전공시켰더라면 도움이 되었을까, 하고 후회했다.
아들은 온유하고 따뜻한 성품을 가진 아이였다. 때때로 시를 써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으며 그 시가 너무 유려해 나는 아들이 시인이 될줄 알았다. 장난감으로 엄마에게 애정표현도 자주 해주었다. 자라면서는 레고를 좋아하고 뭐든지 보이면 도무지 어린 아이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잘 쌓아 놓아서 나는 아들은 건축가가 되려나 하기도 했다. 어느날 장염에 걸려 열이 40도가 나면서도 걱정하는 나에게 웃어보이며 ‘엄마 사랑해’라고 말하던 아이의 얼굴을 나는 잊지 못한다. 생각해 보면 아들은 어렸을때부터 영재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더니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식탁위에 반듯이 앉아 백과사전을 펼쳐놓고 요약하며 자신만의 과학 노트를 만들었다. 3학년쯤 되니 누나의 수학 문제집을 가져다 풀기 시작했고 6학년쯤되니 혼자 정석을 끝냈다. 그때까지 단 한달도 바이올린과 기타를 제외한 모든 학원에 다녀보지 않았던 때였다. 초등학교 4학년때 아이의 담임선생님께서 아이를 영재원에 보내라고 권유하셨지만 나는 보내지 않았다. 대신 ‘한생연’ 이라는 실험위주의 센터에 보내고 싶었는데 한달에 백만원이 넘는 금액을 남편이 지원해 줄리가 없어 포기했다. 아들은 스스로 서울 과학고에 들어갈때까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두고두고 미안했다.
남매는 유난히 사이가 좋았다. 학원에 다니는 시간이 많았던 친구들과 달리 둘이 함께 노는 시간이 많아서였는지, 늘 부재중이었던 아빠와 과도한 집안일에 바빴던 엄마 때문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딸 둘 혹은 아들 둘을 가진 엄마들이 ‘어쩜 그렇게 남매인데도 사이가 좋으냐, 우리는 딸둘인데도 너무 싸워서 중재하기가 힘든데’ 라고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그들은 정말 지금까지도 든든한 서로의 상담자이자 조력자이다.
아이들은 나에게 사랑을 듬뿍 베풀어 주었는데 그건 내가 외롭고 고단한 결혼 생활을 견디는 힘이 되었다. 그들은 주식회사 예동을 차려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했다. 내 생일이 되면 가랜드와 사진을 붙여놓고 공연을 열어 주었고 크리스마스 때마다 너무 이쁘고 황홀한 초청장이 날아왔다. 그들이 준비한 바이올린과 플루트 공연을 보며 나는 행복을 만끽했다. 정말이지 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생일과 크리스마스 때만이 아니었다. 내가 유치원에서 일할 때는 쿠폰 선물이 도착했다. 안마 쿠폰, 설거지 쿠폰 뿐만아니라 마술쇼를 열어준다는 재치있는 쿠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난폭한 아빠 밑에서도 건강하게 자랄줄 알았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이들을 위해 15년 넘게 100가지가 넘는 기도 제목을 써놓고 매일 기도했다. 다른 어떤 유산을 물려주는 것 보다 나는 아이들을 신앙심으로 그리고 기도로 돕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모든 불안을 감추지 못했고, 자주 그 사실을 아이들에게 들켰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미안한 마음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아이러니 하게도 두 아이의 우울증으로 허무하게 그만두게 되었다. 내가 기도할수록 아이들의 상태가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응급실에 다섯 번 정도 쫒아가야했고 네 번의 정신과 입원을 지켜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