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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힐 Feb 19. 2020

[책] 쓰기의 말들 : 으른의 글쓰기

쓰기의 말들/ 은유 지음/ 유유 출판사

참으른이 말하는 글쓰기의 길잡이 책. 내공이 느껴졌다. 얼마나 글쓰기를 좋아하고 사랑하는지 느껴졌다. 천생 글쟁이라는 것도. 한문장 한문장 오래 머물게 하고, 때론 함축적이며 어렵다고도 느껴졌다. 시를 공부했단다. 맨 처음 시를 썼고, 자신의 모든 글이 시와 같았음 좋겠다고 했는데, 정말 시같은 문장, 단락이 많았다. 어려운 단어도, 어려운 생각도 많이 담겨있다. 문장 수집가답게 어마어마한 좋은 문장들도 가득 담겨있다. 이 많은 문장을 어떻게 모았을까. 존경심과 더불어 나의 얕은 내공이 부끄러웠다.


은유의 글을 향한 시선


(네모칸 글은 책 인용글 입니다.)

삶의 구체성을 벗어난 무책임한 비유가 아닌 일상의 구석까지 훑어 내는, 삶의 무자비와 세계의 인식 불가능성을 순순히 인정하는 진짜배기 글을 쓰고 싶었다.

구체적이고, 솔직한, 섬세한 진짜배기 글을 쓰고 싶은 은유 작가.


남을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가 발 디딘 삶에 근거해서 한 줄씩 쓰면 된다.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은 누구나 글감이 있다는 것.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뿐이랴. 글쓰기는 만인에게 공평하다.

이 문구가 참 위로가 된다. 나의 모든 것이 글감이 될 수 있다는 것. 쓰기는 공평하다는 것. 비교하지 않고, 한 줄씩 묵묵히 쓰면 된다는 것! 글쓰기의 출발을 가볍게 해준다.


읽고 쓰며 묻는다. 몸으로 실감한 진실한 표현인지, 설익은 개념으로 세상만사 재단하고 있지는 않는지. 남의 삶을 도구처럼 동원하고 있지는 않는지. 앎으로 삶에 덤비지 않도록, 글이 삶을 초과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과하지 않고 정직하게 글쓰기. 남의 삶을 이용하지 않고, 진실한 마음으로 글을 쓰는 태도.


어떤 것이 글감이 되고 어떤 것이 글감이 되지 않는가. 처음엔 선별의 문제로 접근했다. 작가라는 자의식도 없던 때, 글이 쓰고 싶어서 무작정 글을 쓰고는 너무 유치한 거 아닌가 검열하곤 했다. 딸아이가 키우는 새우젓만 한 물고기 구피이야기, 성남 모란시장 음식점에서 본 취객 이야기 같은 글감이 그랬다. 그 왜소하고 볼품없는 것들이 사유를 자극하고 생각의 갈래를 피워 올렸고 그래서 나는 썼지만, 정치와 사회와 역사의 거대 담론 사이에서 어쩐지 위축되곤 했다.

아무리 유치하고, 멋이 없어 보여도 가장 나다운 글이 전달력과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글감의 선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무게, 진정성에 따라 달리 느껴지는 거 아닐까.


그 글을 고치면서 깨달았다. 난 유익한 정보, 새로운 관점을 전해 주기보다 잔재주를 뽐내고 과시할 욕심만 앞서 알맹이 없는 글을 쓴 거다. 이 일을 계기로 난 달라졌다. 자의식을 버리고 직업의식을 챙겼다. 내 역할은 세상과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글을 한 접시 차려내는 일이다. 일용할 양식을 쓰자.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글. 한 접시의 일용할 양식. 크~~~ 표현 보소! 글을 일용할 양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은유의 글은 고급스럽고 맛있다. 음미하면서 먹는? 문장들이 많다. 가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내공이 느껴지고, 깊다.


작가의 소양


사람의 빛깔이 달라지는 시간. 한 사람에게 작가의 소양이 형성될 즈음. 무엇을 읽었느냐보다 어디에 누구와 있었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조지 오웰의 불지옥 오 년. 아니 작가 수업 오 년을 상상하니 그렇다.

무엇을 읽었느냐보다 어디에 누구와 있었는지... 작가와 작가의 글에 영향을 미치는 근본적인 요소들. 어디에서 누구와 어떤 걸 보고 느꼈는지...그것을 담으면서 작가의 빛깔이 형성되고 그 빛깔은 작가의 글에 반영된다.


작가의 재능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희귀하지 않다. 오히려 그 재능은 많은 시간 동안의 고독을 견디고 계속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 리베카 솔닛

작가의 어떤 재능보다는 오랜 시간의 고독과 인내를 견딘 자가 빛나는 작가.


"내가 아우슈비츠의 시간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글을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마 글을 써야 할 동기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학생 때 내 이탈리아어 성적은 보통이었고 역사 성적은 형편없었다. 내가 특별히 흥미를 느낀 과목은 물리와 화학이었다. 그래서 나는 화학자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글을 쓰는 세계와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직업이었다. 수용소의 경험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는 자신이 글을 쓰게 된 계기를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어느 화학자가 죽음의 수용소를 통과하고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이 내겐 너무 강렬했다. 무엇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할까. 그것이 항상 알고 싶었다. 글쓰기에 관한 열쇠를 하나 찾아낸 것 같아 반가웠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 알려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 그것은 곧 작가가 되는 출발점. 글쓰기의 분명한 동기.


나는 글쓰기에 재능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글 쓰는 일은 지겹고 괴로운 반복 노동인데 그 고통을 감내할 만한 동력이 자기에게 있는가. 재능이 있나 없나 묻기보다 나는 왜 쓰(고자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여긴다.

재능보다 알맹이(?). 무슨 이야기를 왜 쓰고자 하는가! 동기와 알맹이 내용이 빛날수록 나의 글은 빛날 것이다. 어떤 테크닉적인 글이 아니라 꼭 하고 싶은 이야기, 소중한 이야기를 잘 써보고 싶다.



용기 있는 글쓰기


어쩌면 용기란 몰락할 수 있는 용기다. 어설픈 첫 줄을 쓰는 용기,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용기, 진실을 직면하는 용기, 남에게 보여 주는 용기,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용기, 다시 시작하는 용기.....도돌이표처럼 용기 구간을 왕복하는 일이 글쓰기 같다. 오죽하면 이성복 시인이 말했을까. "글쓰기는 오만한 우리를 전복시키는 거예요."
처음엔 나의 생각과 감정을 담아 남들 앞에 내놓는 일이 쑥스러워 몸이 굽었다. 그래도 굽은 몸으로 꾸준히 쓰고 의견을 냈다. 안 쓰고 안 부끄러운 것보다 쓰고 부끄러운 편을 택했다. 부끄러움 총량의 법칙이 있는지, 왕창 부끄럽고 나면 한결 후련했다. 부끄러워야만 생각하므로 부끄럽기로 자처한 측면도 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아는 자기 인식이야말로 쾌감 중 으뜸임을 알았다.

나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어쩌면 용기가 필요한 일. 부끄러울 수도 괴로울 수도 있다. 그 용기의 구간을 왔다 갔다 하며 나의 글을 다듬고, 나를 마주한다. 그 가운데 깨닫는 인식들이 있다. 그 인식으로 나의 인격이 다듬어지기도 한다. 모든 보람, 후회, 부끄러움, 감사 등등의 수많은 인식들. 깨닫고 깨닫고 조금씩 변하는 시간들.



글쓰기 TIP


강준만은 <글쓰기의 즐거움>에서 글쓰기 의미를 두 가지로 구분했다. 스타일 중심의 글쓰기와 메시지 중심의 글쓰기. "내 글은 스타일에 약하고 '메시지 실용주의'에 경도돼 있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의 글엔 자료와 인용이 많다. 퀄트 처럼 정보를 엮어 생각의 무늬를 만든다. 단행본만 이백 권 이상 출간했다는 그는 책 공장으로도 불린다. 창작자보단 편집자형 필자다. 소설가 김훈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서재에 백과사전과 도감 종류의 책만 남겨 두었다고 했다. 그는 '팩트주의자'로 통한다. "정보와 사실이 많고 그것이 정확해야 하며 그 배열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물론 그는 팩트의 벽돌로 미문의 성채를 쌓아 올리는 스타일리스트이기도 하다. <씨네 21>의 편집장 주성철은 기자나 작가가 쓰는 글이 성질은 다르지만 취재가 근본이라는 점은 같다며 이렇게 말한다. "후배 기자들에게 제발 '그냥' 쓰지 말라고 잔소리를 한다.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으면 관련 자료라도 왕창 찾아서 읽어라, 우리 때는 인터넷도 없었어라며 아재 인증을 빼놓지 않는다. 기자의 시각도 취재한 만큼 정교해지고 작가의 이야기는 취재한 만큼 풍부해진다. 그래서 이런 글이나 저런 글이나 결국 풍부한 팩트가 중요하다. 침대가 과학이듯이 팩트가 곧 감정이다." 다른 듯 닮은 말. 글쓰기가 막막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특히 막막할 땐 나 역시 자료부터 무작정 모은다.

정확한 자료는 글쓰기를 자유롭게 한다고 한다. 글을 쓰고자 하는가? 먼저 팩트, 자료를 풍성히 모아보자. 그 자료들 가운데 길이 보이고, 더 선명하게 주제를 밝혀줄 수 있을 것이다.


글에서 보여 주어야 할 것은 '주제와 관련된 상황'의 구체성이다. '어제 카페에서 하루 종일 만화책을 읽었다'가 아니라 '창이 넓은 2층 카페에서 만화 <레드 로자>를 읽었다'가 좋다.

구체적인 글이 더 좋다고 한다! 모호한 표현보다 팩트와 구체적인 단어로 대체해보자!


소설가가 지구력, 시인이 관찰력이라면 기자는 순발력을 요하는 듯한다. 어쨌거나 소설가, 시인, 기자는 매일 글을 쓴다. 그 직업을 얻기까지도 매일 썼을 것이고 얻고 나서도 계속 쓸 것이다. 직업인이 되면 원고 청탁이든 기사 할당이든 쓰기의 장이 마련된다. 그럼 글쓰기의 실력이 는다. 신경가소성의 원리다. 같은 일을 반복하면 뇌의 구조가 그에 맞춰 바뀌기 때문에 계속 연습할수록 더 잘하게 된다. 어느 정도까지는.
어떤 불확실성과의 싸움. 내겐 너무 익숙한 일이다. 살갗 아래 인대처럼 글쓰기 근육 또한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하다. 글쓰기 근육 또한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하다.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도 문득 난감하다. 뭐가 도움이 되는 건지,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그러나 어쩌랴. 글쓰기는 다른 방도가 없다. 학인은 성실하게 쓰고, 나는 정확하게 의견을 제시하고, 그 반복을 통과하는 사이 굽은 게 펴지고 살이 오르며 글에 힘이 붙는다.
매일매일 쓰는 동안 안 보이는 성장의 곡선을 통과했다. 어떤 불확실성의 구간을 넘겨야 근육이 생기는 것은 몸이나 글이나 같은 이치였다.

무엇이든 그렇겠지만...정말 연습, 끈기, 인내가 중요하다는 점. 연습, 연습, 반복, 반복 ! 신경가소성의 원리 잊지 말자!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부터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까지 부사를 자제하라고 당부한다. 사실과 근거가 탄탄하면 부사는 빼도 된다. 예외는 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그립든" 같은 시구처럼 부사는 말의 결을 살리고 뜻을 잡아 주기도 한다. 글쓰기 초보자에게는 부사가 독이다. 부사가 번성하면 주어와 동사로 이뤄진 주제 문장의 메시지가 묻힌다.
나중에 보니 글쓰기 책에서는 하나같이 '접속사 금지령'을 내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접속사가 많은 글은 설명적이고 무겁다는 것이다. 그걸 알고부터 퇴고할 때 작정하고 접속사를 잡아냈다.

**부사, 접속사 피하기!!! 더 깔끔하고, 간결하고 명확한 문장을 위해서~~~


세계는 복수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고 있지만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상대방의 '말귀'를 알아듣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남도 알겠지 하는 생각은 금물이고 착각이다.

타인의 입장에서 내 글을 바라보기. 객관적인 시선으로 내 글을 바라보자! 타인에게 내 글은 이해할 수 없을지도, 어려울 수도 있다. 얼마큼 잘 표현하고 쉽게 서술할 수 있느냐가 관건?!


일단은 분량 무시하고 주제에 맞는 내용을 한바탕 쓰고 그다음에 중복되거나 불필요한 문장과 단어를 지우는 식으로 원고를 손본다. 조사 하나 부사 하나, 원고지만 잡아먹지 않았는지 꼭 필요한지 점검한다. 불변의 진리지만 글은 고칠수록 나아진다.
크게는 두 가지 질문을 오가면서 읽는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가'와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잘 전달되었는가'. 그 단어가 정확한지., 문장이 엉키지는 않는지, 단락 연결이 매끄러운지, 근거는 탄탄한지, 글의 서두와 결말의 톤이 일관된 지, 주제를 잘 담아내는지. 살피고 고친다.
글을 책으로 엮으며 알았다. 좋은 글을 쓰려면 먼저 그 자신이 영리한 독자, 냉정한 판관이 되어야 한다. 글이 삐걱거리는 순간을 알아채는 감각이 우선, 더 낫게 고치는 기술은 다음, 갈수록 나아지는 글을 보는 기쁨은 오래 기다려야 주어지는 선물이다. 첫 독자에만 주어지는 아주 귀한.

***고칠수록 글이 더 나아진다는 것! 정말 공감한다. 하지만 그 고치는 과정까지 가기가 쉽지 않다. 쓴 글을 또 읽고 또 읽으며 수정하는 게 쉽지가 않다. 하지만 보면 분명히 보인다. 오타, 어색한 문장, 불필요한 문장들 등등 '주제'와 '간결함'을 생각하며 탈고하기***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수정 및 탈고하면 더 나은 글을 볼 수 있는 선물, 기쁨을 맛볼 수 있단다 ^_^***


한강은 손가락 관절이 아파서 연작 세 편 중 <채식주의자>와 <몽고반점>은 컴퓨터 대신 손으로 썼다고 한다. 나중에는 손목 통증으로 백지 한 장을 채우기 힘들어졌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2년을 보내다가 볼펜을 거꾸로 잡고 자판을 두드려서 <나무 불꽃>을 썼다는 것이다. 장편소설 노동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나도 무리해서 원고를 쓰면 입안이 헐고 손가락 관절이 욱신거린다. 뒷목부터 어깨까지는 상습적으로 뭉쳐 있고 뻣뻣하다. 책 보고 글 쓰는 게 좌식노동이라 몇 개의 뼈와 근육이 집중적으로 혹사당하는 것 같다.
필력은 체력이다. 머리가 맑지 않으면 단어 하나 떠오르지 않고 사실 관계 확인도 귀찮아지니까 단단한 글이 나올 수 없다. 감정의 건강도 챙겨야 한다. 작가는 쓰는 사람이기 전에 듣는 사람이다. 심사가 복잡하면 왜곡해서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듣는 귀도 건강에서 온다.
한강의 소설이 그랬고, 마음에 쏙 드는 책을 보면 예전엔 문장과 관점이 보였는데 이젠 작가의 체력과 눈물이 보인다. 위대한 작품 뒤엔 위대한 건강이 있다.

작가는 건강해야 한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그래야 글을 쓸 수 있다. 좋은 글을! 위대한 작품을!!!***



글을 써야 하는 이유


내 삶을 찬찬히 돌아보고 글로 적어 두기. 이 세계의 무자비한 힘에 끌려가지 않기 위한, 태어난 것을 덜 후회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글쓰기는 그런 힘이 있다. 세상에 끌려가는 나를 붙잡아주고, 지금 나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고, 다시 후회할 길을 가지 않도록 도와주는 힘!


그나마 글로 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변덕스러움, 나약함, 얄팍함, 불확실성을 어디서 확인할까. 이토록 오락가락하면서 과연 어디로 가는지 궤적을 어떻게 그려 볼까. 흔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흔들리는 상태를 인식하는 것. 글이 주는 선물 같다.

크~~~ 흔들리는 상태를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글이 주는 선물! 쓰지 않으면 어떻게 가고 있는지 모른다. 어떤 감정과 어떤 상태로 살아가는지 모른다. 그저 하루하루 꾸 꾸역 세상의 시간에 맞춰 끌려가고 있을 뿐.


"많이 팔기 위해 속이고 속고 하면서 가면을 써야 했다. 이 년쯤 일을 하고 나니 새벽 퇴근길에 누군가에게 욕을 퍼붓고 속 시원하게 무언가 때려부숴야 하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이대로는 내가 미쳐 버리겠구나 싶어서 그 일을 그만두고 쉬었다." 이 문장은 자기 정리로써 글쓰기가 왜 필요한지 보여 주는 좋은 사례다. '장사할 때 안 좋았다', '사람들 때문에 힘들었다'같은 느낌의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의 옷을 입은 기억. 이런 기억 복구 작업인 글쓰기는 과거의 회상이면서 현재의 보호막이 되어 준다. 스스로 가치 판단을 내려 본 일이므로, 나쁜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삶의 자리에 다시 찾아가는 일은 피할 수 있을 테니까.

나또한 경험했다. 모호했던 기억이 선명해지면서 그때의 추억과 상처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또 나의 실패를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가이드 라인을 잡아주었다.


책을 내면 부끄럽기도 하고 좋기도 한데, 부끄러운 것 책을 낸 사실 자체이고 좋은 건 모르는 사람과 친구가 된다는 점이다.

글을 나누는 것은 개인이 모르는 다수와 연결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은유 작가의 말처럼 친구가 생기는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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