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백남준을 다시 이야기하는 이유
최근 런던에 다녀올 일이 생겨 테이트모던 백남준 전시를 운좋게 볼 수 있었다.
2달 전 전시가 오픈할 때 이숙경 큐레이터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고 인터뷰 기사를 쓰기도 했는데. 유명 미술관에서 전시가 열리게 되니 이래저래 다시 예술가 백남준을 생각하게 됐다.
전시장에서 만난 백남준은, 교과서에서 봤던 뭔가 익숙하고 조금은 위인전에 나올 법한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그 백남준과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회고전에서 여러 작품들을 통해 본 백남준는 열린 마음으로 시대를 끌어안고 자기를 세계에 내놓은 천재이자 풍운아였다.
전시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그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고장난 라디오처럼 되풀이하는 전시와 2019년의 맥락에서 백남준을 다시 보여주는 전시. '그 유명한' 백남준만 만나 심드렁해지는 전시와, 작품의 맥락 속에서 생생히 살아 숨쉬는 백남준을 만나는 전시의 차이는 무엇인가.
12월 9일 테이트모던의 큐레이터, 발렌티나 라바글리아를 만났다. 그는 이숙경 큐레이터와 함께 협력한 '백남준'전 담당 큐레이터다.
함께 나눈 이야기 중 내게 가장 기억이 남는 건, 그녀가 단언하듯 말했던 이 한마디였다.
"개인적으로 '창시자', '개척자' 혹은 'ㅇㅇ의 아버지'라는 이야기에 회의적이야. 사실 그 예술가가 반열에 오르게 된 데엔 '첫 시도' 말고도 훨씬 더 복합적 요소가 있잖아. 또 작품이 완전한 진공 상태에서 이뤄진 것도 아니니 엄밀히 말해 처음이란 것도 맞지 않을 때가 많아. 백남준 전에 볼프 보스텔이 텔레비전을 작품에 넣기도 했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습관처럼 백남준을 그저 '미디어 아트의 창시자', '비디오 아티스트'로만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백남준 이야기가 '그 유명한 비디오 아티스트' 였다면, 그 다음은 뭔데? 라고 했을 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번 전시였다.
그녀와 나눈 이야기 중 일부나마, 기사에 담지 않은 것들도 모아 정리해봤다.
- 이번 전시를 통해서 백남준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됐다고?
"백남준은 미디어 아트를 그가 '발명'했기 때문에 중요한 게 아니야. 그 스스로도 그런 내러티브를 주장하지 않았지. 다만 그렇게 표현되곤 했던 것이고. 그런데 백남준이 TV를 활용한 유일한 아티스트도 아니였거든 당시.
중요한 거, 그리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건 백남준이 얼마나 미디어 아트의 한계를 멀리까지 밀고 나갔느냐. 그게 제일 중요하지. 이 점에서 그가 시각 예술은 물론 시청각 미디어의 발전에 큰 영향일 미쳤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고. TV를 그저 매체로 활용한 게 아니라, TV가 작동하는 방식과 그 시스템 모두를 활용한 거야.
예전에 1980년대 MTV 미학이 백남준에게서 출발했다고 했을 때, '음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래서 뭐?'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그의 삶의 흔적과 1960년대 이미 사이키델릭이나 실험적 시각 예술에서 끌어온 시각 언어들을 보면. 백남준 이름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그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니까."
- 넌 어떻게 전시에 같이 하게 됐어?
"난 원래 소장품 디스플레이쪽에서 주로 일했어. 근데 내가 타임 베이스 미디어에 경험이 많았거든. 히토 슈타이얼 작품도 해봤고, 구스타프 케츠거의 Liquid Crystal Environment 설치 작품도 했었고, 오마르 패스트 등등 여러 작가들의 것을 일해봤어. 기술을 활용하는 작품에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백남준 전시에 참여하게 된거지.
또 내가 실험 음악에 관심이 많았거든. (네가 딱 맞는 사람이었네.) 맞아 여러 측면에서. 게다가 나 플럭서스랑 1960, 70년대 예술도 좋아해서 잘 맞았지.
- 플럭서스랑 백남준 보면 유머가 많잖아. 그런 측면도 좋아하는거야?
"백남준이 유머 감각이 있는 건 확실하지. 근데 유머로 그치지만은 않지. 플럭서스나 백남준이나 모두 유머를 작품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입구 혹은 도구로 활용했다고 생각해. 플럭서스는 유머로 예술과 삶을 뒤섞어서 결과적으로 그걸 정치적 스테이트먼트로 풀어냈고. 백남준은 그걸 통해서 기술과 문화 생산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
-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밸런스를 맞춘걸까?
"나는 백남준을 연구하면 할수록, 백남준이 고급 예술을 대중 예술로 위장하고 싶어했단 생각이 들어. 1960년대 작품 로봇 오페라를 보면 'Kill Pop Art'라고 적어놓은 문구가 많거든. 그렇다고 팝 아트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대중 시각 예술의 언어를 그대로 차용한 거지. 그걸 '트로이의 목마'로 활용해 고급 문화를 쏟아 내는 거야. 그러니까 코미디 프로그램이나 스포츠 영상을 보다 갑자기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가 중간 중간 등장하는 식인거지."
- '트로이의 목마'라는 표현이 멋있네.
음 물론 때로는 그냥 진짜 장난이고 이면에 별 내용이 없을 때도 있지. 하지만 많은 작품들에는 그 뒤에 수많은 레이어가 숨겨져 있어.
- 전시장 초입에 'TV 부처'가 있잖아. 서양에서 열리는 전시인데, 동양 철학을 어떻게 접근했을지 궁금해.
"그 부분은 백남준의 생애와 연결이 되어 있지.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이주했잖아. 어떻게 보면 불교나 도교 철학을 살로 부딪치며 경험한 사람이지. 동시에 백남준은 서구의 아방가르드 음악과 시각 예술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유럽으로 건너왔고.
그런데 유럽에 가보니, 동양 철학 특히 선불교나 도교가 서양에서 일종의 '수입품'처럼, 비트닉이나 히피 문화에서 하나의 대안처럼 여겨지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존 케이지를 만났을 때 이랬을 것 같아. '나 방금 거기 있다가 모두 뒤로 하고 왔는데, 그걸 여기서 당신이 다시 이야기 한다고?!'
내 추측이지만, 백남준은 서구에서 약간은 판타지처럼 여겨지는 동양 철학의 맥락을 직접 경험한 사람으로서 다시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 게다가 어딜 가든 거의 유일한 아시아인이었을테니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도 어느 정도 알았을 듯하고."
- 전시장의 대미는 '시스틴 채플'이 장식하는데, 기획자들이 왜 하필 이 작품을 복원하기로 한거야?
"우선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이후로 단 한 번도 복원한 적이 없었어. 거기엔 이유가 있지. 복원 작업이 정말 까다로웠거든. 심지어 작품에 쓰인 스위치 중에 아직도 정확히 작동 방식을 알아내지 못한 것도 있어. 백남준재단 큐레이터, 기술자와 미술관 전문가들이 협력하고 최대한 기억과 직접 경험을 되살려 복원해냈어. 쉽지 않았지만, 테이트나 SFMoMA라는 큰 기관에서 전시를 한다고 했을 때 하나의 챌린지로 받아들일 만 한 과업이지."
- 완성된 걸 봤을 때 기분이 어땠어?
"일단 그 전체 설치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될 지 상상하기 어려웠어. 코너에 프로젝터 5-6대 두고 실험은 해봤지만, 전체가 어떨지 잘 안떠오르더라고. 그리고 전체가 켜졌을 때, 그렇게 이미지가 만화경처럼 가득 채워진 모습이 환상적이었어. 누가 나에게 스테인드 글라스로 빛이 들어오는 모습 같다며 제목이 왜 '시스틴 채플'인지 알겠다고 이야기 해줬는데. 공감은 갔지만 여기서 시스틴 채플에는 창문이 없다는 건 짚어줘야할 거 같아. 거긴 벽화로 가득 차 있어.(웃음)"
- 가장 좋아하는 전시장이나 작품이 있어?
"물론. ‘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백남준 첫 개인전 복원 공간). 이번에 연구하면서 이 개인전이 얼마나 혁명적이고 전복적인지 다시 깨달았어. 음악은 물론이고 참여 예술, 퍼포먼스, 기술과 시각 예술의 경계를 종합적으로 허물었는데, 이걸 아주 자연스럽게 해냈어. 대단한 업적이야."
발렌티나는 여기 적은 것들 말고도 정말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적절한 유머를 섞어서 백남준을 이야기해줬다. 첨엔 기사 생각하고 약간 질문을 미리 생각하면서 말하려다 거의 1시간 동안 수다를 떨고 미술관 닫을 시간이 다 되어서 부랴부랴 사진 찍고 전시장에서 헤어져야만 했다.
이탈리아 출신인 그녀는 한국인이 이 전시를 볼 때, 특히 '오마주 투 보이스'를 보고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고 했다. 이 작품에는 굿 퍼포먼스와 한국 전통 문화 오브제들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이제 '미디어아트 창시자'를 넘어서는 다양한 맥락의 연구가 더 활발하게 이어졌음 좋겠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연구자도 한국에 국한되지 않은 여러 이야기를 당연히 할 수 있겠지만, 최소한 21세기 한국의 관점에서 재생산한 백남준의 맥락이라면, 국제 미술계에서도 당연 궁금해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