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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 Jul 23. 2019

일본에서 돌아온 화가의 마지막은 우리 그림으로 가득했다

박생광 화백의 아들 '박정'씨에게 들은 그의 마지막 5년

  화가 박생광(1904~1985)은 말년 한국적인 채색화로 화단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1980년대 이전까지만해도 박생광은 일본의 영향이 배어나던 그림을 그리던 화가였다. 그런데 1979년, 일본에서 돌아온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5년 여 동안 완전히 다른 그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외부와의 교류도 차단하고 작업했던 이 시기 그의 옆을 지킨 것은 아들 박정 씨(74)다. 박 화백의 마지막 5년을 박 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했다. 대구미술관에서 열리는 ‘박생광’전(10월 20일까지)은 15년 만의 회고전으로 회화와 드로잉 등 162점을 선보인다.



박생광, 해질녘, 1979년 Ⓒ대구미술관


오래도록 품어 온 '우리 그림'에 대한 열망


  일본에 머무르던 아버지는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한국에 왔다. 잠시 머물던 아버지가 떠나려고 하자 가족들은 연세가 여든이 다 된 아버지를 붙잡았다. 가족들의 만류에 아버지는 며칠을 생각했다. 그러다 말씀하셨다.


 "그럼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가지말까? 그럼 일본에 있는 내 그림을 다 가져오자."


  그 때부터 아버지는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첫 그림은 8호 캔버스에 작게 그린 ‘무속’이었다. 이 그림은 후에 대작으로 그려지고, 1985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의 ‘르살롱-85: 한국 16세기부터 오늘날까지의 예술’전 포스터가 됐다.


  그러나 당시 아버지의 그림을 본 후배 작가들은 “지금 그림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왜 이상한 걸 시작하느냐”고 했다. 아버지는 그저 생글생글 웃으며 “내가 딴 생각이 있어 그렇다”고 답했다. 


  다른 사람들이 가고 나서 조용히 아버지에게 다시 '왜 이런 그림을 그리시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걔네는 몰라. 얘기하면 길다"고 하더니 나중에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 40대 때부터 우리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 당시 드로잉을 찾아보면 솜털을 얼굴에 붙인 사자탈도 있고 한국 전통 탈그림이 많다. '아 우리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라는 열망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가 이제서야 그것을 시험해보는 것이다."


박생광, 무속, 1981년 Ⓒ대구미술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출입금지' 써놓고 작업하다


  사실 아버지는 늦은 나이에 일본으로 가서 전람회에서 수상도 하면서 조금씩 자신감을 가지셨던 것 같다. 그리고 또 다른 결정적 계기가 찾아왔다. 호암미술관에서 아버지가 '게르니카' 포스터를 사와서 열심히 보시더니, "아 역시 역사를 그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역사화를 시작했다. 


  평생 그렸던 수묵화가 아닌 다른 그림을 그리려고 하니 굉장한 노력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작업실 문 앞에 '출입금지'를 써 붙이고 사람도 만나지 않은 채 작업에 몰두했다. KBS에서 아버지를 소재로 프로그램을 촬영한다고 하자 PD에게 '역사책을 많이 갖다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받은 역사책을 아버지는 쌓아놓고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는 책을 항상 읽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단군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주체적인 역사를 그리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그렇게 그림을 급하게 그려야 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아버지가 후두암을 앓고 계셨기 때문이다. 


  의사는 나에게 아버지가 1-2년 밖에 살 수 없다고 했다. 의사가 본인에겐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내가 계획이 있으니 빨리 얘기해줘야한다"며 나를 재촉하셨다. 그래서 그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는 걸 알려드릴 수 밖에 없었다. 그걸 알게 된 아버지는 대작 200점 시리즈를 계획하셨다. 작업실 문 앞에 ‘출입금지’를 써 붙이고 작업에 몰두하셨지만 계획의 절반밖에 이루지 못하셨다.



박생광, 토함산 해돋이, 1981년 Ⓒ대구미술관


파리 그랑팔레 '르살롱'전을 대표하다


  아버지 그림에 대한 주변의 반응은 갈렸지만, 그가 돌아가시기 직전 행운이 찾아왔다. 1984년 10월 프랑스미술가협회의 아르노 오트리브 회장이 동아시아 기획전을 위해 내한해 덕수궁미술관에서 우연히 아버지 작품을 본 것이다.


  오트리브 회장은 “이 젊은 작가는 누구냐”고 물었고, “젊은 작가가 아닌 노(老)대가다”라고 하자 당장 작업실로 가자고 했단다. 수유리 자택 겸 작업실로 온 오트리브는 “한국은 일제강점기도 있으니 게르니카 같은 작품이 나올 법 한데 왜 풍경에만 집착하나 싶었다”며 “이게 바로 세계적인 그림”이라고 했다. 그는 아버지를 파리 전시에 초청했다.


  오트리브 회장의 말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아버지는 대표작인 ‘전봉준’과 ‘역사의 줄기’를 제작하셨다. 차기작으로 안중근을 그려야겠다며 나를 데리고 기념관에 가서 사진을 찍게 하고 스케치도 해보셨지만, 그 그림만은 완성하지 못했다. 그리고 샤갈도 만나길 기대하셨는데, 안타깝게도 그 만남도 성사되지 못했다. 이렇게 1980년부터 시작한 아버지의 불꽃같은 마지막 5년간의 작업은 1985년 7월 막을 내렸다.



가운데 갈색 양복을 입은 박생광 화백과 왼쪽 아들 박정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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