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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 Apr 29. 2019

'정답'만 바라보는 한국사회 위한 전시-아스거 욘

국립현대미술관 '대안적 언어 - 아스거 욘, 사회운동가로서의 예술가'

덴마크 예술가 '아스거 욘'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가 열린다기에 구글에서 검색해봤다. 작품 사진을 보니 테이트 모던에서 추상표현주의 작가들과 함께 한 귀퉁이에 전시가 된 걸 본 기억이 되살아났다. '덴마크 변방의 추상 회화 작가를 왜 갑자기 전시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곧바로 나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급격히 멀어졌다. 


그리고 간담회날. 그저 그런 추상표현주의 추종자 중 한 명일 거라는 나의 무지한 추측은 전시를 보고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아스거 욘은 추상표현 추종자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자신에게 상을 주겠다는 구겐하임재단에게 "지옥에나 가라!"며 거절 편지를 보낸 인물이었다. 게다가 기 드보르와 함께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을 창립한 멤버이기도 하다...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은 파리 68혁명의 토대가 된 이론이다!) 


"변방 추상 작가를 왜 전시하지?"..나의 무지한 추측은 전시를 보고 산산조각 났다.


큐레이터 인터뷰 요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만난 박주원 큐레이터는 "정답만 바라보는 한국 사회에서 정답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을 요구한 작가의 측면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나는 '작품보다 기획이 멋진 전시'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 이유를 아래에 정리했다. 



그림의 의미를 지우다


아스거 욘(1914~1973년)은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잭슨 폴록(1912~1956)과 비슷한 시기 활동했다. 그리고 1960년대 미국 미술 시장에서  '추상표현주의'로 묶여 소개가 되면서 인지도를 얻었다. 그 결과 영미권 미술관에서 '추상표현주의 추종자' 중 한 명으로 치부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직접 전시를 보면 욘의 추상은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 이론처럼 평면성을 강조한 게 아니라, 전통 회화의 의미를 지우고 해체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Modification' 시리즈가 이 의도를 가장 잘 보여준다.


세속의 마리아(1960년)/Modification


  위 작품처럼 Modification 시리즈에서 아스거 욘은 파리 벼룩시장에서 산 전통적 서양 회화 위에 낙서를 했다. 제목이나 작가의 활동을 고려했을 때 이 작품은 전통적 서양 회화의 권위를 해체하는 작업으로 읽힌다.

  마르셀 뒤샹이 '모나리자'에 수염을 그려 넣은 'L.H.O.O.Q'나 만 레이가 다리미에 압정을 박아서 그 의미를 무화시킨 작업과도 비슷하다. 그림 혹은 사물(다리미는 다림질을 해야 하는데 압정을 박아 예술작품으로 만듬)의 의미를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욘은 1948년부터 1951년까지 파리에서 대안 문화 그룹 '코브라(CoBrA)' 를 결성하고 활동했다. 코펜하겐, 브뤼셀, 암스테르담의 앞글자를 딴 이 그룹은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보는 이미지가 가장 진실하다'고 봤다. 

이 같은 '해체'의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이 있다. 욘은 덴마크에서 독일 나치의 점령을 겪고 절망스러운 시기를 보냈다. 이 때 저항예술그룹 '지옥의 말'을 결성하기도 했다. 1차세계대전이 '다다'를 낳은 것처럼 2차 세계대전도 유럽인들에게 허무와 의심, 해체를 일으킨 것이다. 


예술을 통한 사회 변화를 꿈꾸며

창조적 지성의 열정적 저항이여 영원하라(1968년)

한편 '해체'의 관점에서 욘의 작품은 조금 식상한 면도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더 명료한 해체의 작업을 뒤샹이나 만 레이가 이미 40~50년 전인 1910년대 말에 선보였기 때문이다. 


욘이 돋보이는 건 그보다 사회 활동에 참여하고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을 탈퇴한 뒤에는 '스칸디나비아 반달리즘 비교 연구소'를 설립해 북유럽 전통 시각 예술을 연구하며 '사상가' 역할을 활발히 했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도 이런 역할을 집중 조명해 그저 그런 작가일 수 있는 아스거 욘을 아주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특히 욘의 정치적 문구가 담긴 포스터나, 북유럽 바이킹족의 고대 문명 등 시각 예술을 연구한 다양한 책과 사진 등의 자료가 그의 선구자적 면모를 잘 보여줬다. 그런데 박 큐레이터에 따르면 덴마크에서도 욘의 정치적 활동 자료를 요구하는 그의 모습을 신기해했다고 한다. 정작 현지에서도 회화 등 작품 위주로 조명을 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이러한 착점의 이유에 대해 '공공 미술관 큐레이터의 역할'로 답했다. 


"갤러리가 아닌 공공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대중과 예술 사이의 접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냥 덴마크 작가를 소개하는게 아니라 한국 관객에게 의미있는 지점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죠."


'정답'만 원하는 한국 사회를 위한 전시


'삼면 축구'를 미술관 속에 재현한 작품. 냉전 시대를 살았던 욘은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 북유럽의 문화가 새로운 주체로 대안이자 견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쪽문을 통과한 두번째 방에서 욘이 수집한 사진을 보고, 또 그곳을 나와 '삼면 축구'에 이르면 이 전시가 암시하는 바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냉전 시대를 살았던 욘은 미국과 소련 중심의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북유럽 문화가 새로운 주체로 대안이자 견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63년에 국제상을 주겠다는 구겐하임재단에게 "당신들의 어처구니 없는 시합에 참가하지 않겠다"며 상을 거절한 전보도 전시장에서 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추상표현주의를 CIA가 냉전에서 문화 정치 프로파간다로 이용했다는 여럿 연구가 떠올랐다. 당시 CIA는 소련의 강력한 전통문화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 문화 기관을 후원했었다. 물론 전시가 이런 부분까지 건드리는 것은 아니다.


박 큐레이터는 문학과 예술에서도 '상징하는 바'를 객관식으로 고르게 하면서 '정답'을 찾는 한국 사회에서, 주어진 답을 거부하고 새로운 길을 가면서 주체가 되려고 했던 욘의 흔적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미술관에서도 작품을 만나기 전에 '해설'과 '설명'을 요구하는 관객이 여전히 많아요. 욘의 작품은 정해진 답이 없는 작품이니 정말 자유롭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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