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드먼드 마운틴 Nov 10. 2019

"휴대폰 케이스가 더럽고 낡았네요."

내 삶의 흑기사

대전에 살고 있는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안부를 물은 다음에, 전화한 이유를 말했다.

“형, 다름이 아니라 이번 일요일에 부산에서 강의가 있어요. 그런데 갑작스론 복통으로 병원 갔는데 내일 수술 받아야 한데요. 일요일 강의는 불가능해요. 형이 그 강의를 대신 가주면 안 될까요?”    


얘기를 들어보니 구청에서 후원하는 문화센터 강의였고, 대체강의를 해달라는 말이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해. 못한다.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 알아봐.”


나는 거절했다. 경제 관련 주제인데다, 부모와 자녀를 대상으로 했고, 나는 서울 사는데 장소는 부산이고(고속철도가 있으니 거리 큰 문제가 되진 않지만), 오늘이 목요일이다. 대상과 장소는 문제가 안 된다고 해도, 내용, 준비시간을 생각해보면, 도저히 할 수 있는 강의가 아니었다. 몇 번이고 못한다고 말했다.     

후배는 다른 사람 알아봤지만,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다 생각난 사람이 나인데, 나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이유를 물으니, 강의도 하고, 임기응변이 뛰어나고, 논문 두 개 있으면 새로운 논문 하나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칭찬인지 욕인지, 그렇게 30분을 얘기 하다가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후배가 던진 말 한마디, “형은 역시 나의 흑기사야.”였다.     


이 사건이 있은 일주일 후에, 온라인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K와 처음으로 만났다. 프로모션 때문에 섭외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숍으로 이동해서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일 얘기 하다가, K는 대화 중간에 탁자 위에 놓인 내 휴대폰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휴대폰 케이스가 더럽고 낡았네요.”

“네?”

‘그걸 이 타이밍에 콕 집어서 얘기해야 하나.’     

나도 휴대폰 케이스가 낡아서 보기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선물 받아 애착 있는 물건도 아니다. 색깔까지 촌스럽다는 핀잔을 듣기도 해서, 새로 하나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지가 서너 달은 되었다. 생각해보면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무신경한 거였다.

“이런 말 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신성일씨는 폐쇄적인 성향이 있으시군요.”

‘뭐래^^;    


나는 당황스러워 “네?”라는 반응만 보였다. K의 말이 계속 됐다.   

“휴대폰 케이스를 보면, 신성일씨가 집에서 사용하는 물건들 중에 버리거나 교체할 물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군요. 신성일씨가 잘사는지 못사는지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신성일씨 능력을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신성일씨 생활의 한 부분을 얘기하는 겁니다. 신성일씨 집에 안 가 봐도 대충 알거 같아요. 독서를 좋아하시니, 책은 많을 것 같은데, 집이건 사무실이건 사용하는 물건들은 낡거나 먼지가 쌓여 있을 겁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시고요.”

“아, 네....”

‘이 여자 정체가 뭐지.’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속담이 내 상황에도 적용되는 것인가.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여자였다. 대화는 전달하는 사람도 잘 풀어서 말을 해야 하고, 듣는 사람도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지적질 당해서 기분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이 말을 들었을 때,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런 무례한 여자가 있나.’, ‘갱년기가 일찍 찾아 왔나,’라는 생각부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물건을 통해 타인이 나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 누군가는 검소함으로 보아줄 거야.’라는 생각이 위안을 주었지만, 휴대폰 케이스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고 차일피일 미룬 것은 나의 게으름이다. 이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렇지, 휴대폰 케이스 하나로 폐쇄적 운운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복잡 미묘한 생각과 감정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왔다 갔다 했다. “그래.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라며 불쾌한 감정을 가라앉힐 수 있었던 건,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는 직업정신 덕분이었다. 나는 그녀 입에서 어떤 말이 더 나올지 궁금하면서도 불안해했다. 아니나 다를까, K는 작심한 듯 말을 이어갔다.     

“신성일씨가 물건을 만들거나 판매하는 회사의 면접관이라고 생각해보세요. 면접 보러온 사람의 휴대폰 케이스가 낡고 지저분하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그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고 싶을까요? 그 사람이 미혼인 경우. 소개팅 나갔을 때도 마찬가지에요. 센스 있는 상대라면, ‘어휴, 저 휴대폰 꼴이 뭐야.’라고 생각하면서 다음 만남에 적극적이지 않을 겁니다.”

“아니, 휴대폰 케이스 하나로 어떻게 그 사람의 생활을 파악할 수 있는 거죠?”


그녀의 얘기를 들은 나는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표정이 바뀌며 날선 대응을 했다. 그러자 그녀에게서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제 말에 기분이 나쁘다고만 여기시면 신성일씨의 변화는 없습니다. 대체로 사람은 자기 방식대로 살다가 자기 방식대로 삶을 마감합니다. 어떤 계기가 없으면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하찮은 물건처럼 여기는 휴대폰 케이스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직면해서 삶의 변화를 가지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것이 용기이고요. 잘 아시잖아요?”

‘내가 뭘 잘 안다는 거지. 이제는 독심술까지.’    


나는 대답 없이 K의 눈만 바라보았다.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녀 말에 일리가 있었다. 기분이 언짢다가도, 틀린 말이 하나도 없으니 화낼 수도 없고, 이 묘한 기분은 뭘까. 그녀는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우리 삶에서 소중한 가치들이 있잖아요. 신성일씨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의 본질을 깊이 고민해 보세요. 삶의 소중한 가치에 집중해서 본질을 찾고, 거기서 즐거움과 행복을 누려보세요. 그리고 누군가가 본질을 파고들면서 충고할 때 가볍게 흘려듣지 마세요. 행복은 행동하는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그렇다고 너무 완벽하게 조이며 살지는 말고요. 그러면 피곤한 삶이 될 수 있어요.”

‘소크라테스 후손 나셨네.’    


그렇게 그녀 얘기가 여기서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정말, 쥐구멍으로 밀어 넣는 마지막 한방의 돌직구를 날렸다.

“아까 식사할 때 보니까, 식사도 엄청 빨리 하시더군요. 상대방과 속도를 맞춰가면서 드셔야지요. 음식의 본질도 고민해 보세요.”

‘나, 오늘 지대로 한 방 먹었다.’     


그녀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는지 모른다. 그녀는 내 속마음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나와 K는 그날, 그렇게 (웃음의 속내는 다르지만) 웃으며 헤어졌다.    

 

이 날의 만남은 나의 흑역사 중에도 왕흑역사였다. 이삼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알았다. 이날 K와의 만남이 공회전만 하고 있던 내 삶에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동력이 되어 주었고, 그녀는 내 인생에 예고 없이 등장한 가장 센 흑기사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흑역사가 때로 자신의 가장 빛나는 백역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서.

작가의 이전글 삶의 본질을 찾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