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지 않음을 좋아하는 것
덕질의 분야는 정말 많고, 나는 참 다양하게도 좋아해 봤다. 유명인, 연예인, 소위 말하는 아이돌, 배우 등. 배우를 좋아할 수도 있고, 배우가 연기하는 역할을 좋아할 수도 있다.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만화 캐릭터, 게임 캐릭터. 성우를 좋아하기도, 그림 작가를 좋아하기도 하고, 모든 요소를 종합적으로 여기기도 한다. 사람 혹은 생명체로 한정지어도 이렇게나 다양하기에, 이를 또 다른 분류로 나누는 것은 쉬운 일이다.
나는 주로 살아있음과 그렇지 않음으로 나눴다. 물론 이대로는 오해의 소지가 있기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실존함과 실존하지 않음으로 구분했다. 실제 살아있는 사람을 덕질하는 것과, 누군가가 만들어낸 창작물을 덕질하는 것은 꽤 큰 차이를 만들어냈다.
살아있는 사람. 다시 말해 실존 인물은 말 그대로 독립적이고 자아를 가진 채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내가 개입하기 어렵고, 변화를 예측할 수도 없다. 다만 잦은 변화는 우리에게 흥미를 주고, 결국 매일 다른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은 질릴 틈 없이 새로움을 준다. 반면 가상 인물 혹은 실존하지 않는 캐릭터는 다소 고정되어 있다. 그 인물의 설정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설정이 주는 매력이 있고, 철저히 만들어짐에서 오는 안정감이 있다.
나는 매일 같이 새로움을 원하는 편이기에 실시간으로 정보가 전달되는 날이 잦은 덕질을 좋아했다. 업데이트를 기다리거나, 다음 화를 기대하는 편은 아니었다. 기존에 있는 것들을 사랑할 때는 상관이 없었지만, 그 정보들을 모조리 수용하고 나면 나의 관심은 서서히 식어가는 수순을 밟았다. 끊임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지는 곳에서, 잠시의 틈은 눈을 돌리게 만들기 쉬웠다.
살아있지 않은, 실존하지 않는 것들을 좋아할 때면 꼭 들려오는 질문이 있다.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좋아하냐는 말이다. 만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는 사실은 사람에 따라서는 이해할 수 없을 지점일 것이다. 살아가며 어떤 경험을 더 중요시 여기는가에 따라 차이가 난다. 직접 그 공간에 도달하여 마주하는 일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장소 상관없이 어디서든 볼 수 있다는 것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사실 내 입장에서 보건대, 덕질의 장소는 그 분야에 따라 바뀌는 것이 맞지만, 어느 하나가 더 나은 곳이라기보다 각각의 특성에 맞는 곳이 있을 뿐이었다. 덕질 대상도 마찬가지였다. 직접적인 교류를 원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형태는 오히려 비슷했고 그래서 나로서는 별 생각이 없었다.
다만 종종 쓸쓸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주로 완전한 창작물이 아닌, 애매한 위치에 놓인 분야가 그랬다. 좋아하는 배우가 연기한 좋아하는 작품 속 배역이 그랬고, 자신의 컨셉을 유지하는 버츄얼 유튜버가 그랬다. 분명 배우도 좋아하고 맡은 역할도 좋아하는데, 배우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작품 속 인물은 어느 순간 멈춰 흐르지 않을 것이라는 게 어색했다. 컨셉이 있는 없든 저 사람을 좋아했을 것이라 생각해도 결국 컨셉 없이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는 버츄얼 장르의 특성이 외롭게 만들었다. 살아있다고 믿게 만들고서는 한 번에 사라지는 존재들은 언제나 깔끔하지 못한 이별을 하도록 만들었다.
지금도 나는 이곳저곳을 좋아하고 있다. 모든 장점과 단점을 겪으며 다만 행복만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살고 있다. 좋아하는 일 자체를 좋아하게 된 나는 한순간에 빠져버린 마음에 충실하기로 했고, 그래서 더 많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곳이 어디든, 어떻든 덕질의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이 정답일 것이다. 무엇을 좋아했더라도 남은 마음은 비슷한 형태를 보임에 따라 결국은 모든 게 같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