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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미니민 Jun 11. 2017

쿨한 사람은 없다

괜찮은 게 아니고, 괜찮은 척 하는 사람만 있다

5년 전 이 맘 때 쯤, 우리 집에 외국인 손님이 온 적이 있었다.

막 봄학기가 끝나가던 대학생이었던 나는 (즉, 제일 집에서 한가한 사람이었던 나는), 그 친구를 위한 서울 투어 가이드를 하루~이틀 정도 해줬었다.

한 날은 종로 쪽을 그 친구와 돌다가 시장 길거리에서 파는 종이컵 믹스베리를 그 친구가 먹고싶어해서 사서 지하철에 들고 탔다. 블루베리와 라즈베리, 산딸기 등을 손으로 집어먹던 그의 손이 새까맣게, 그리고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 나 : 너 손 더러워지고 있어

- 외국인 손님 : 알아, 신경 안 써.


캘리포니아 해변과 넓은 들판에서 쭉 살아온 그는, 아주 대인배답게 손이 더러워지는 것을 신경쓰지 않고 종이컵에 든 믹스베리를 지하철에서 해치웠다.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는 눈치였다. 나는 그래서 그에게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제일 쿨가이 (coolest guy I've ever met)'라는 찬사를 보냈고, 그는 멋쩍지만 무심하게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종로에서 그 당시 살던 집까지 꽤 멀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믹스베리를 다 먹고도 집 까지 가는 길이 한참 남아있자 더러워진 그의 손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는지 집까지 남은 길 동안 그는 얼룩을 지우기 위해 몇 번이고 얼룩진 손을 입으로 빨아 얼룩을 없애려 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가족들에게 내가 본인을 '세상 제일 쿨가이'로 칭찬해줬다며 동네방네 들떠서 얘기하고 다녔다. 그를 보며 세상이 바라보는 쿨한 사람은 어쩌면 가장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JTBC < 마녀사냥 > 캡처본


다시 신입으로 회사를 옮기고, 부서배치를 막 받아 새로운 팀원분들과 점심을 한 자리에서였다. 이전 회사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 일을 했는지, 일을 하기 전에는 대학교에서 어떤 것을 배웠는지 같은 아주 기본적인 신상조사를 하고 나서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 때 불쑥 팀원 한 분이 물어봤다.


- 팀원 1 : 근데, 이전 회사에서 성희롱 관련 이슈가 있었어요?

- 나 : 네?

- 팀원 1 : 이사님이 너 전 회사 임원이랑 친분이 있으셔서 저녁자리를 가셨는데, 전 회사 임원이란 분이 대뜸 '그 회사는 성희롱 문제 같은 거 있냐'며 물었대요. '지금 그 회사로 이직하는 친구가 그런 문제에 대해 아주 민감하다'며 신신당부 했다길레, 무슨 말인가 해서요.


어이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나를 멕이는(?) 게. 내가 잘못한 건 없었으니, 그 간 있었던 얘기를 담백하게 해줬다. 부서 내 성희롱 문제가 있어 그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자 전 팀장이 나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했었고, 그 때문에 팀을 옮겼었다고.


- 팀원 2 : 아, 그럼 다른 신입한테 있었던 일에 대해 문제 제기를 본인이 한 거에요?

- 나 : 아뇨. 저한테 일어난 일이었어요.


내가 너무 감정기를 싹 빼고, 사실만을 컴팩트하고 담백하게 얘기해서 그랬는지 팀원들은 이 대화가 끝나자 나한테 그런 일이 있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한 표정들이었다. '정말 쿨하다'는 감탄과 '이젠 괜찮냐'는 걱정 섞인 형식적인 안부를 받았다. 형식적으로 나는 '네, 이젠 시간이 좀 지난 일이라 괜찮아요' 하고 넘어갔다.


그러고는 얼마 안 돼 또 내 주변에 직장 내 성희롱 문제가 일어났다. 

이번엔 대상이 내가 아닌, 같이 협업하여 일하는 분께 성희롱 관련 일이 일어났다. 가해자는 높은 직급인 게 똑같았지만, 피해자는 이성 부하직원 뿐만 아니라 동성 부하직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목격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내가 배석한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 가해자는 어떤 면에선 나에게 러브샷을 강요하고, 손을 잡아끌고 같이 춤을 추자고 했던 점에서 나 또한 성희롱 피해자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이전 직장에서 성희롱 문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사실이 원치 않게 밝혀졌기 때문에 이를 괜히 문제삼아 '예민한 요즘애들'이 되기 싫었다. 차라리 다음 번엔 일찍 귀가해서 '이래서 여자들은 안 돼' 라는 얘기를 듣는 게 더 속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더 수위높은 행위를 벌인 성희롱 사건의 피해자가 내가 아니라는 점과, 이를 목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큰 안도를 했다.


문득, 안도하면서도 감정이 불편했다. 내가 또 이런 일을 겪고 있는 사실이 분하기도 했지만 내가 피해자가 되지 않은 것과, 그 사건을 목격하지 않음으로써 내 책임을 덜 수 있는 데 안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했다. 결국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고, 쿨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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