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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mize Impact Sep 02. 2022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

얼마 전, 결혼 근 1년 만에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지는 목포에서 배를 타고 2시간 반이 걸리는 홍도와 흑산도. 국내여행이라 해외여행에 비해 피로도는 덜했지만, 매번 여행 때마다 겪듯 이번에도 집을 떠난지 며칠만에 피부가 다시 뒤집어져버렸다. 덕분에 추억도 사진도 많이 남기지 못했다.


10대, 20대 혈기가 왕성할 때는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때는 지금보다 체력이 좀 더 있었고 여행 경험도 많이 없었기에 여행에 대한 환상도 그만큼 컸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행이나 출장으로 집을 떠나 생활하는 경험들이 쌓이면서 내 몸은 여행에 최적화되어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어디론가 멀리 떠날 때마다 피부가 뒤집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명절에 부모님 댁에 내려가도 그랬다. 


다른 공기과 습도, 청결도를 알 수 없거나 어떤 세탁제를 사용했을지 모르는 침구, 숙소에 있는 다른 먼지와 미생물, 수질이 다른 물, 평소와 다른 시간에 일어나고 잠들기, 다른 음식들... 여행이 주는 이 모든 새로움은 아토피안인 내게 '몸의 주기'를 깨는 일이기도 하다.


새벽녘 바닷가 근처에서 바닷 바람을 쐬며 밤 늦게까지 술도 한 잔 곁들이고 싶다. 하지만 제때 잠들지 않고 평소 잘 안먹던 걸 게다가 늦은 시간에 먹는다는 건 나에게 또다른 각오가 필요한 일이다.


뒤바뀐 생활 패턴으로 여행 중에는 피부가 가렵고 발진이 올라올 때가 많다. 그러면 항히스타민제나 스테로이드를 먹는 것으로 일단 몸을 잠재우는데 그러면 가려움과 발진을 가라앉는 대신 하루종일 정신이 몽롱하고 졸음이 쏟아져서 그 나름대로도 여행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 때마다 '아, 그냥 집에서 발 닦고 잠이나 잘 걸'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토피안에겐 여행 포비아가 몇 가지씩이 꼭 있다.  

예전 아토피안 자녀 둘을 키우는 한 보호자분이 "우리 애들은 시골 할머니 집에 가는 걸 정말 싫어해요. 다른 침구에서 자는 게 찝찝하다고 항상 집에서 쓰는 이불을 가져가요"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백번 공감.


여행할 때마다 언제 세탁했는지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다른 미생물, 다른 먼지가 (잔뜩?) 묻어있을 것 같은 아니면 깨끗해 보이긴 하지만 어떤 세탁세제를 사용했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침구에 몸을 뉘이는 공포감이란.


나의 경우에는 한 가지가 더 있는데 혹시 포진이 얼굴에 번질까 봐서다. 오래전, 뉴질랜드에서 얼굴 전체에 포진이 뒤덮인 이후로는 어딜 가서 든 병원이 얼마큼 가까이 있나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포진은 초기에 잡지 않으면 몇 시간이나 하루 이틀 만에도 심각하게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다녀온 500여 명 남짓 사는 작은 섬 홍도에는 야간에도 운영되는 보건소가 하나 있었다.



내 방을 여행하는 법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파스칼

문득 '내 방을 여행하는 법'이라는 책을 읽고 싶어졌다. 여행은 구경하는 게 아니라 발견이라는 부제가 달렸다. 프랑스 수학자이자 철학자, 작가, 신학자, 심리학자 파스칼(계산기도 이 냥반이 만들었다고. 핵토 파스칼도 이 수학자의 이름을 따왔다)은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고 했다.


파스칼을 위키에서 검색해보면 '어릴 때부터 허약해서 줄 곧 집에서만 시간을 보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양반도 그래서 내 방 여행자가 되었군. 오늘은 내 방에서 브런치로 세계를 조금 더 깊게 여행해본다. 내게는 새벽녘 해변가에서 마시는 소주보다 훨씬 값진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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