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 안아주며
마주하니 시리즈와 연결돼 있습니다.
함께 보시면 완결한 이야기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머리가 백지가 됐다. 무례함에 용서를 구하려 했는데, 입이 굳어 버렸다. 최 과장의 얼굴을 본다. 빛을 잃은 내 눈엔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침묵이 길었을까. ‘틱’ 하고 복도 형광등이 꺼졌다. 그 소리는 귓바퀴에 잔향을 남겼다.
“내려가서 이야기할까?”
고개를 끄덕였다.
좁은 엘리베이터를 지나 1층 건물 입구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밥 먹었어? 얼굴을 보니 못 먹었을 거 같은데.”
“…네.”
“근처에서 밥 먹으면서 이야기할까?”
최 과장은 어두운 길을 먼저 나아갔다. 가로등은 노랗게 번지는데 발끝 그림자는 길다. 퇴근 인파와 반대 방향으로 걷는 탓인지, 바람이 조금 차다. 그는 능숙하게 길을 찾았고 나는 뒤를 바짝 쫓았다.
파란색 간판의 횟집. 오픈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사람이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상쾌한 바다 냄새가 풍긴다. 사장님이 반갑게 맞이했다.
"어휴, 이번 달은 광어가 철이에요! 산지 직송!"
사장님이 광어회 뜨는 포즈를 허둥지둥 보여주며 자리로 안내했다. 우린 광어와 술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서로 아무 말 없이 술잔을 비웠다. 내 심장은 술이 들어가니 조금 진정됐다. 눈이 서로 마주쳤다. 다시 얼굴을 보니 뭔가 결심한 표정이다. 난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과장님 죄송해요. 제가 무례하게 말했습니다.”
“전 그렇게 행동하는 게 팀을 위한 길이라 생각했어요. 개인의 욕심이었죠. 과장님도 힘드셨을 텐데, 제가 제 생각만 했습니다. 얼마나 힘드셨으면 퇴사한다고 말씀하셨겠어요… 제 잘못입니다. 제가 전부 책임을ㅡ.
쨍
반대쪽에서 손이 올라왔다. 나는 말 끝을 삼키고, 잔을 들어 올렸다. 경쾌한 소리거 가게로 퍼져나갔다.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다시 말의 방향을 잃었다. 다시 손에 술잔을 든다.
쨍
“뜬금없지만, 네가 싫었다."
최 과장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피했다.
"나보다 더 잘하는 모습이 부러웠는데, 나중엔 질투가 나더라. 사실 난 너처럼 인정받고 싶었나 봐. “
탁. 서로의 잔이 테이블에 닿는다.
”너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나도 운이 안 좋아 실적이 안 나왔는데... 무기력한 내 모습을 들키기 싫더라, 그런데 네가 날 발가벗겼어. 그 순간 화를 낸 건 사실... 창피함이었어. 그걸 감추고 싶어서 퇴사한다고까지 했다. “
“그런데 네가 죄송하다고 하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 아… 나 지금 잘못된 길로 가는구나. “
쨍... 술잔을 다시 부딪친다.
쾅... 마음의 벽이 부서졌다.
나는 멍하니 최 과장의 얼굴을 봤다. 퀭한 두 눈, 허탈한 표정. 그건 아침에 거울에서 본 나였다. 똑같구나. 너도, 나도.
“어후, 너 취한 거 같은데 잠깐 바람 쐬고 오자.”
주머니 속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한 개의 라이터로 서로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두 얼굴이 불빛 아래 가까이 모였다가 멀어졌다.
나는 깊은숨을 들이켜고 떨리는 손으로 그의 등을 가만히 감쌌다. 생각보다 작고 가벼운 어깨였다. 그 순간, 그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 팔에 힘이 들어갔다.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받은 사람을 안는다. 서로의 무게가 서로를 지탱했다.
“...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
최 과장의 어깨가 가늘게 움직였다. 손이 닿지 않았으면 느끼지 못했을 떨림이다. 잠시 뒤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가깝지 않았으면 못 들었을 소리다.
“나도... 고맙고... 미안하다.”
가로등 불빛을 향해 담배 연기가 올라간다. 연기가 사라지듯, 마음속 앙금도 조금씩 흩어졌다. 11월의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하얀 입김이 짙어졌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말없이, 그저 서로의 상처를 감싸 안은 채로.
지금 돌이켜도, 그날 밤은 하루보다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