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 4. 고지전

by 민 과장


원장님의 거절이 떨어지는 순간, 아침 회의실이 떠올랐다. ‘할 수 있겠냐’는 본부장의 질문에 자신 있게 끄덕이던 내가. 주차장으로 오르는 길마저 고지처럼 가팔랐다. 손가락이 떨려 자판이 잘 눌리지 않았다. 결국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는 “아마 종소세 시즌이라 그럴 거야”라고 잘랐다.



그제야 먼지 낀 창문을 닦은 것처럼 머릿속이 맑아졌다. 종합소득세는 보통 5월에 신고·납부하고, 성실신고확인 대상자는 6월 30일까지다. 병원·전문의 같은 고수입 업종은 대개 6월에 집중된다. 지금은 ‘세금 시즌’이라 현금이 말라 있는 타이밍. 내가 고객의 생리를 간과했다는 걸 인정하고, 결제 시점을 조정하면 다시 기회가 생긴다고 봤다.



계획을 정리했다. 대전제는 ‘마음의 부채‘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현금흐름의 호흡을 맞추는 것’이다.



1. 계약은 지금 진행하되 결제는 두 달 뒤 카드로. 말일 결제는 익월 출금이므로 고객 입장에선 최대 약 2~3개월의 현금흐름 유예가 생긴다.

2. 실장님께 병원 지출내역을 받아 우리와 거래할 때의 절감액을 표로 시각화한다. 매달 줄어드는 고정비를 숫자로 보여준다.

3. 다음 달 세미나 일정을 정리해 함께 제시한다.



이 정도면 전선(前線)을 바꿔 돌파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 사무실로 복귀해 밤늦게까지 키보드를 두드리며 결전 준비를 했다.



“안녕하세요.” 내 목소리가 대기실을 채웠다. 실장님이 작은 목소리로 오늘 원장님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귀띔했다. 다음에 다시 올까 망설였지만, 달력의 남은 날짜를 보고 결심했다. 이번 달 목표와 본부장 보고가 스쳤다. 몇 분 후, 의아한 표정으로 원장님이 나왔다.



처음부터 계약 얘기 대신 학회 소식을 가볍게 풀었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지출내역표를 내미는 순간, 원장님의 손이 안경으로 향했다. 손가락으로 숫자를 하나하나 짚어가기 시작하더니 침묵이 길어졌다. 내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한 번 보시죠.” 고개를 숙이며 반보 물러섰다.



며칠 뒤, 실장님이 “다녀가신 후로 집에 못 간다”라고 툴툴거렸다. 지출내역표가 적중했음을 느꼈다. 두근거림을 삼키고 침착하게 “도와드릴까요?” 하고 문자를 보냈다. “다음에 밥이나 사요”라는 답이 왔다. 커피 기프티콘을 보내고 한 줄 더 눌렀다. 몇 시간 뒤, ‘내일 점심 들어오세요’라는 문장과 이모티콘이 도착했다.



병원에 들어가기 전, 약국에서 박카스 한 상자를 샀다. 실장님께 한 병을 드리니 눈을 찡긋하며 상담실로 가라 했다. 의자에 앉으니 전선 안으로 들어선 기분이었다. 머릿속으로 동선을 점검하고 말을 정리했다. 잠시 뒤 원장님이 들어왔다. 박카스 한 병을 테이블로 밀며 머쓱하게 웃자, 원장님이 박수를 두 번 쳤다.



“피곤하신 것 같아서요.”

“진짜 못 당해내겠네.”

원장님이 박카스를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병이 탁자에 닿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두 달 뒤에 결제하는 걸로 하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답했다.



“네. 말일에 결제하시면 익월에 출금됩니다. 약 2~3개월의 시간이 생기는 거죠. 세금 납부로 조여 있던 현금흐름에 숨통이 트이실 거예요.”

“실장이 자네 표를 보고 밤새 계산기를 두드리더군. 저번에 장비도 어렵게 빌려왔다고 들었어. 고마워.”

원장님은 짧게 콧바람을 내뿜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펜이 종이 위를 지나가는 소리가 승전보처럼 들렸다.



사람들은 영업의 승패가 사인하는 순간에 갈린다고 믿는다. 하지만 진짜 고지전은 선배와의 짧은 통화, 밤새 만든 표, 실장님과의 문자, 박카스 한 병에서 이미 끝났다. 그리고 1년 전 '매출이 안 좋아서'라는 거절에서도 시작되고 있었다. 그때의 실패가 없었다면, 오늘의 전략도 없었을 것이다. 정면이 막히면 전선을 바꾸고, 연대하고, 기다린다. 가장 치열한 전투는, 가장 조용한 순간에 끝나 있었다. 돈의 문제가 풀려도 마음은 남는다—차가운 거절을 녹인 건 온도였다.

이전 04화파트 3. 매출이 안 좋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