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사가 같은 장비를 200만 원 싸게 준대.” 숫자만 보면 끝이다. 그런데 그날, 나는 가격 대신 가치를 꺼냈다.
2020년, 4천만 원짜리 신제품이 나왔다. 해당 제품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하는 장비였다. 정확도는 높아지고, 소독 품목은 10개에서 3개로 줄었다. 재료 소비가 줄어 병원 영업이익은 증가했다. 당시 국내에서 동급 성능을 즉시 도입할 수 있는 대체재는 드물었다.
나는 거래처 80곳을 돌았고, 8곳이 반응했다. 데모까지 진행하니 관심을 보인 건 한 곳이었다. 평소 원장님과 신뢰를 쌓아온 병원이었다.
가을 학회에서 10% 할인 행사가 예정돼 있었다. 나는 한 달 뒤 구매하자고 먼저 제안했다. 원장님 이익이 최우선이었다. 다만 미리 계약을 하더라도 '사전 계약'으로 학회 10% 할인이 적용되는 조건을 먼저 확보했다. 그런데 일주일 뒤 다시 찾아갔을 때, 원장님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고민하시는 부분을 알 수 있을까요?” 내 질문에 원장님은 침묵했다. 경험상 이런 침묵엔 이유가 있다. 원장실을 나와 직원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비교견적을 받고 있었다. 합리적인 선택이다. 내가 해야 할 일만 더 분명해졌다.
다음 날, 점심자리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장비는 어떻게 하실까요?”. 원장님이 말했다. “저쪽이 200만 원 더 싸.”
우리 회사 최대치는 100만 원 할인. 숫자로는 못 이긴다. 그래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준비해 온 이야기를 꺼냈다.
“원장님, 제가 가격 말고 다른 이야기를 좀 드려도 될까요?”
첫째, 급할 때 달려간 사람. 진료 중 자재가 떨어지면 한 시간 안에 채워 넣었다. “작년 한 해만 열두 번이었습니다.”
둘째, 밀착 A/S. 한 달 여섯 번은 기본 방문. 문제가 생기면 그날 해결했다. “아시겠지만, 기계가 멈춘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면, 시간당 최소 50만 원입니다. 3개월 진료시간 평균 매출 55만 원을 보수적으로 잡은 수치죠.”
셋째, 비용 구조. 내가 맡은 뒤 병원 총지출이 14% 내려갔다. 우리 물건만이 아니라 타사 소모품도 전부 비교해 가장 싸게 맞췄다. "2019~2020년도 연간 소모품·소독·소모성 유지비 기준입니다. 원장님 병원 영업이익도 전년 대비 8% 올랐죠. 그 숫자, 함께 만든 겁니다.”
나는 짧게 덧붙였다. "200만 원 가격 차이는 진료시간 4시간만 줄여도 상쇄됩니다." 원장님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지는 게 보였다. “그래서 오늘은 금액 이야기를 덜 하고, 병원이 이미 받아온 ‘가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원장님이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웃었다. “아니, 다 알지. 그냥 한번 확인해 본 거야. 계약서 가져왔지?”
그날 사전 계약은 가격이 아니라 관계가 닦아놓은 길 위에서 성사됐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밥값도 조용히 계산했다. 단순한 영업사원이 아닌 파트너로서.
가격 이슈는 늘 온다. 나는 맞출 수 있으면 최대한 맞춘다. 그래도 안 될 땐, 우리가 만들어온 가치를 수치로 환산해 보여준다. 200만 원 차이? 그건 일회성이다. 하지만 우리가 쌓아온 신뢰와 성과는 매일 복리로 쌓인다.
납품업체가 아니라 병원의 손익을 함께 지키는 동료. 그게 내가 파는 진짜 상품이다. 가격은 오늘 한 번 깎이지만, 신뢰는 내일도 이자가 붙는다. 일회성 가치가 반복되면, 익숙함은 깨지고 디폴트가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