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만 원짜리 안경이 서랍 안에 있다.
디자인도 좋고, 렌즈도 가볍고, 착용감도 분명히 훨씬 뛰어나지만 나는 여전히 10년도 넘은, 당시 7만 원 주고 맞췄던 안경을 쓴다.
귀 옆의 피팅은 조금씩 틀어졌고, 렌즈에는 미세한 스크래치가 가득하며, 무광 블랙 프레임은 군데군데 빛이 바랬지만 그 낡은 안경만큼 내 얼굴에 익숙하고, 내 하루의 감각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은 없다.
처음 그 안경을 썼을 때 나는 막 서른을 넘긴 무렵이었다.
육아와 일 사이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은 흐릿했고,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가던 시기였으며, 그 안경을 끼고 처음 갔던 어린이집 상담날의 기억부터, 아이와 함께 찍은 첫 가족사진, 장례식장 복도에 기대어 눈물 흘리던 밤까지 어쩌면 그 안경은 나보다 더 나를 오래 바라본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물건은 사용감 위에 정이 붙는다.
정이 붙은 물건은 기능을 넘어 ‘기억’이 된다.
그리고 기억은 가격표로 가늠할 수 없다.
사람들은 종종 오래된 물건을 왜 버리지 않느냐고 묻는다.
요즘은 더 가볍고, 더 세련되고, 더 효율적인 것들이 얼마든지 나오고 그것이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삶이 단지 효율의 문제는 아니라고 느낀다.
삶은 익숙함과 감정, 그리고 때로는 버텨낸 세월에 대한 인정으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오래된 안경은 단지 시력을 교정하는 도구가 아니라 내가 나로 살아왔던 모든 시간의 관찰자이자, 동행자였다.
지쳐서 세수를 못 한 날에도, 급하게 밥을 챙기며 허둥대던 아침에도, 거울 앞에 서서 나이 들어가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간에도 언제나 이 안경은 나와 함께 있었고, 어쩌면 그 시선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건 곧 나를 보는 방식의 일종이었는지도 모른다.
새로 산 고가의 안경을 끼면 시야가 맑고, 어쩌면 더 편리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경을 썼을 땐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된 기분이 든다.
너무 똑바르고, 너무 가볍고, 너무 완벽하게 정돈된 감각이 오히려 나의 틈을 무시하는 듯해서, 며칠 쓰다 보면 결국 다시 오래된 안경으로 돌아온다.
사람은 가끔 더 나은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지만 진짜 나를 편하게 해주는 건 ‘완벽한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곤 한다.
아이가 잠든 밤, 문득 책상 위에 놓인 두 개의 안경을 바라보다가 나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었다.
“네가 진짜 원하는 건, 더 좋은 시야냐, 더 편안한 시선이냐?”
나는 아마, 더 뚜렷한 시야보다는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있는 시선을 택하고 싶은 사람인 것 같다.
때로는 낡고 무뎌졌지만 그만큼의 기억과 감정이 쌓인 것들을 곁에 두는 삶.
그건 고집이 아니라, 애착이며, 애착은 결국 살아온 시간을 존중하는 방식이다.
오래된 안경을 쓰고 아침 햇살을 맞으며 문을 나설 때 나는 조금 흐릿할지언정 익숙한 세상을 다시 걷는다.
그건 단지 오래된 물건을 쓴다는 선택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나를 인정하고 다시 하루를 시작하는 마음의 태도일 것이다.
이 안경을 언제까지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언젠가는 정말로 기능을 다해버릴지도 모르고, 내 얼굴과 맞지 않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나는 이 오래된 안경을 쓰고 조금 낡은 마음을 껴안은 채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가 나를 기억할 때, “우리 아빠는 늘 같은 안경을 쓰고 다녔지”라는 말속에 내 삶의 일관성과 내 마음의 무게가 조금쯤 담겨 있기를, 나는 은근히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