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쉼표를 하나 찍는다

by 민이새

토요일 아침은 평일보다 조금 더 느리게 밝아온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지고, 부엌 창문 너머로 어제 밤새던 비가 그친 자리에 얇게 물기가 남아 있다. 싱크대에 컵 두 개를 놓고 우유를 따르는데, 발소리 없이 큰애가 먼저 나온다.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눌린 채로 하품을 하며 냉장고를 연다. 작은애는 이불을 고양이처럼 끌어안고 버티다 결국 내 말에 밀려 일어선다. 토요일인데, 토요일인데,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래도 9시까지 보충수업이라니, 말끝은 삼켜진다. 토요일 주말 아침, 아이들은 9시까지 학원 보충수업을 가야 한다.


식탁은 잠잠한데 손은 분주하다. 바나나 껍질을 길게 벗기고, 우유팩을 기울이면 종이벽 사이로 얇은 소리가 흐른다. 가방은 어젯밤 현관 옆에 줄 맞춰 세워뒀다. 지퍼는 이미 닫혀 있고, 이름표가 반짝인다. 손에 챙길 건 물 한 병뿐이다.


바나나 하나 더 먹을래?


괜찮아.


아이들의 하루는 작은 확실성들로 간신히 서 있다. 현관에 가지런히 선 가방처럼, 제 자리에 있을 것들이 제 자리에 있다는 사실. 그래서 주말 아침에도 시간표는 구겨지지 않은 채로 아이들 손에 들린다.


차 시동을 거니 라디오에서는 오늘 날씨와 미세먼지, 체감온도 같은 단어들이 차례를 기다린다. 신호 대기 중에 백미러로 아이들을 보면, 의자 등받이에 가방을 붙잡고 있는 손이 보인다. 작은애는 안대를 쓴 듯 눈을 감은 채로, 큰애는 입술을 꼭 다문 채로. 주말 아침 도로는 한산하고, 상가 셔터가 반쯤 내려온 채로 쭉 이어진다. 편의점 앞 아이스커피 광고판만 유난히 색이 선명하다.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이 한두 명 보인다. 그 옆을 지나칠 때 차창 너머로 눌어붙은 빵 냄새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간다. 오래전 내 토요일은 이런 냄새였다. 놀다가 배가 고프면 슈퍼에서 컵라면을 하나 사서 뜨거운 물을 붓고, 뚜껑을 덮고, 햇볕이 내리쬐는 계단에 앉아 삼 분을 기다리던 시간. 그 삼 분이 그렇게도 길었다.


어제 문제지 다 풀었어?


응.


어려웠던 건?


기억 안 나.


대화가 길어지지 않는 건 아이들 탓만은 아니다. 나는 요즘 내 질문이 질문인지 확인 절차인지 헷갈린다. 칭찬을 하고 싶은데 자꾸 체크가 된다. 다만 뒷좌석에서 둘 사이로 흘러 다니는 정적은 그리 불편하지 않다. 이 나이가 되면 어색함이 아니라 여백이라는 걸 안다. 말을 덜어내야 겨우 보이는 것들이 있다. 창밖의 박스전구, 새로 바뀐 약국 간판, 같은 자리에 쭉 서 있는 플라타너스. 아이들이 크게 되면 이런 디테일을 기억할까. 아니, 기억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이 길 위에서 아침의 공기를 어른과 함께 나눠 마셨다는 감각 하나쯤만, 몸 어딘가에 눌어붙어 남으면 된다.


학원 건물 앞에서는 주차를 잠깐 세워둘 틈도 없이 아이들이 순서대로 내려 붙는다. 같은 시간대에 도착한 차들이 줄지어 서고, 그 안에서 비슷한 표정의 아빠 엄마들이 손을 들어 보인다. 아이들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자동문 사이로 흡수된다. 가방은 몸통보다 커서 뒷모습이 한층 더 작아 보인다.


끝나고 뭐 먹을래?


작은애가 돌아보며 말한다.


떡볶이.


큰애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인다. 문이 닫힌다. 안과 밖의 공기가 다른 질감으로 분리되는 순간, 나는 갑자기 한 발짝 늙는다.


차를 돌려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골목을 하나 더 돌아 나왔다. 오늘따라 공원이 비어 있다. 물기를 먹은 모래밭이 질척한 색으로 반짝이고, 그 위에 세발자전거 바퀴 자국이 선명하다. 그 선명함이 이상하게 서글프다. 아이들이 놀지 못해서가 아니라, 놀아도 흔적이 그냥 흔적일 뿐이어서. 놀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건 언제나 몸이고 표정인데, 요즘의 아이들은 그 표정에 여유가 없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에는 말보다 선명한 뜻이 있다. 말하면 구질구질해지는 것들이 한숨 한 번에 걸러진다.


내 어릴 적 토요일은 늘 소리가 컸다. 공 차는 소리, 구슬 튕기는 소리, 공기놀이 손끝에서 튀어나오던 깔깔거림, 가끔 싸우다 우는 소리. 부모들은 손목시계를 보다가 점심때쯤 현관문 앞으로 와서 소리쳤다.


밥 먹어라!


그 한마디면 끝이었다. 누구도 어디서 무엇을 배웠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 저녁 무렵, 해가 기울 때가 되면 집집마다 불이 켜졌고, 그 불 아래서 숙제 공책을 펴면 연필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온 집을 메웠다.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그 무심함이 무능이 아니라 믿음이었다는 걸 뒤늦게 안다. 너는 놀아도 된다, 왜냐하면 너는 해낼 거니까. 놀고도 해낼 수 있는 힘이 앞으로 네 삶을 지탱할 테니까. 그 믿음의 표정이 지금의 나에게는 과제처럼 남아 있다.


아버지 생각을 한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버지는 내 아이들 이름을 부르는 재미로 살았다.


이놈들은 참 바쁘다.


아버지가 자주 하던 말. 그 말에는 감탄과 걱정과 이해가 함께 섞여 있었다. 내가 그때 이렇게 대답했다.


요즘은 다 그래요.


그날의 어색함도 따라온다. ‘다 그렇다’는 말만큼 책임을 미루는 표현이 또 있을까. 다 그렇지 않은 방법을 하나쯤 찾는 게 어른의 일일 텐데, 나는 편의점 간편식처럼 손이 덜 가는 길로 자꾸만 기운다. 안전하고, 익숙하고, 결과가 예측 가능한 선택들. 아이들의 시간표는 그렇게 빽빽해졌고, 토요일 주말 아침 9시까지 학원 보충수업은 자연스러운 관습이 되었다.


커피를 산다. 테이크아웃 컵을 들고 차에 타니 손바닥이 따뜻해진다. 온도가 사람을 안심시키는 건 오래된 사실이다. 커피를 입에 대고 라디오 볼륨을 줄인다. 사소한 기사를 하나 전하고, 진행자가 소소한 농담을 던지고, 스튜디오 웃음소리가 순간 멀어진다. 그 작은 소리의 여백에서 문득, 오늘 오후를 어떻게 보낼지 그림이 하나 떠오른다. 별것 아니다. 집에 돌아가면 한 시간을 깨끗이 비워두는 것.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아무 데도 데려가지 않고, 각자 흘러 다니게 두는 것. 작은애는 종이 접기에 빠질지 모르고, 큰애는 유튜브로 게임 공략을 보다가 갑자기 색연필을 꺼낼지도 모른다. 나도 거실 바닥에 누워 아이들과 같은 방향을 보면서, 같은 속도로 멍해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 한 시간이 무릎에 얹힌 보온팩처럼 아이들의 주말을 부드럽게 데워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든다.


물론 숙제는 남아 있고, 다음 주 학원 진도표는 메신저로 올라올 것이다. 현실을 모른 척할 수는 없다. 다만 반복되는 문장에 쉼표 하나를 찍는 일은 할 수 있겠다.


토요일 주말 아침, 아이들은 9시까지 학원 보충수업을 가야 한다.


그 문장 뒤에 쉼표 하나 찍고,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다.


그리고 잠깐 놀았다.


놀았다는 과거형을 우리 집 주말에 한 줄씩 더해가는 일. 나는 어른이고, 어른이라서 허락장을 써줄 수 있다. 결과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조금 모자라면 다음에 채우면 된다고, 네가 지금 커가는 데 필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온도라고. 그 말들을 오늘은 소리 내어하지 않아도 좋다. 시간표에서 한 칸을 비워두는 행동만으로도 전해지는 메시지가 있다.


학원 끝나는 시간에 맞춰 다시 차를 몰고 나갈 것이다. 아이들이 자동문을 밀치고 나오는 순간, 나는 멀리서도 표정을 읽는다. 수학 문제 하나가 풀렸는지, 영어 단어가 입에 붙었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좋은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다. 그럴 때 나는 떡볶이의 양을 조금 조절하고, 사이다에 얼음을 더 넣거나 덜 넣는다. 작은 조절로 하루의 무게가 달라지는 걸 아이들이 언젠가 알게 될까. 알지 못해도 괜찮다. 그 무게 조절은 내가 어른으로서 할 수 있는 노동이고,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아도 되는, 우리 집만의 기술이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공원 옆 벤치 위에 비둘기 두 마리가 나란히 올라서 있다. 비둘기는 늘 거기 있다. 변하지 않는 것들은 대개 생존력이 강하다. 아이들이 자라고, 나와 아내가 늙고, 동네가 바뀌어도, 토요일 오전의 빛과 공원의 나무 냄새와 운동장 모래의 진흙색은 묵묵히 제자리를 지킨다. 그 사이로 아이들의 주말은 조금씩 속도를 늦추고, 대신 표면의 온기가 올라간다. 그게 오늘 내가 바라는 전부다. 오늘 하루가 꼭 유익하지 않아도, 쓸모를 증명하지 않아도, 쌓여서 어느 날 아이들 몸의 안쪽에서 조용히 열을 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아주 짧은 쉼표 하나를 찍어 둔다.


종일 달려온 일주일의 문장 속에서 쉼표는 단순한 구두점이 아니라 숨구멍이라는 것을, 아이들이 언젠가 자기 언어로 깨닫기를 바라면서. 오늘은 그렇게, 학원을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마음 한 귀퉁이를 살짝 열어 두기로 한다. 떡볶이를 먹고, 잠깐의 낮잠을 허락하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멀어지는 동안, 우리 집의 주말은 문장 사이의 여백처럼 천천히, 그리고 충분히 살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