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by 민이새

이른 아침, 동서울터미널 문을 여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전광판 숫자는 또렷했고, 매점에서는 뜨거운 캔커피를 갓 채워 진열대에 올리고 있었다. 표를 뽑아 좌석 번호를 확인하고, 배낭 무게를 한 번 더 조정했다. 오늘은 혼자 움직이는 날이라 모든 확인이 평소보다 반 박자 더 꼼꼼해졌다. 이어폰은 꺼두고, 알림도 껐다. 길에서 굳이 누군가의 속도를 빌리고 싶지 않았다.


버스는 정시에 출발했다. 강변북로에 들어서자 한강 물빛이 회색에서 은색으로 넘어갔다. 창문에 이마를 대니 유리 진동이 얇게 전해졌다. 커브를 돌 때마다 좌석 등받이에서 낮은 진동이 올라와 몸이 자연히 박자를 맞췄다. 문득, 혼자 가는 길의 가장 큰 장점은 생각을 길이가 아니라 깊이로 다루게 된다는 점이라는 걸 떠올렸다. 급하게 정리할 것도, 누구에게 설명할 것도 없으니 같은 생각을 조금 더 밑으로 내려보낼 수 있었다. 도로 표지에 ‘속초’가 처음 뜬 건 양양을 지나서였다. 그 단어 하나로 몸이 바로 정리됐다.


터미널에 내려 배낭을 메고 바로 걸었다. 아침 공기에는 소금기와 젖은 나무 냄새가 섞여 있었다. 전기 킥보드가 간간이 지나가고, 시장 쪽으로 배달 오토바이가 간혹 보였다. 바다로 곧장 가지 않고 청초호로 먼저 틀었다. 호수를 따라 난 데크는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고, 벤치에는 조깅을 마친 사람들이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물 위에 떠 있는 갈매기 몇 마리가 같은 자리에서 내려앉았다가 다시 떠올랐다. 도시의 속도보다 반 박자 느린 움직임을 보니 긴장이 풀렸다.


트래킹은 외옹치 바다향기로 데크부터 시작했다. 해안가를 따라 이어지는 나무길은 생각보다 넓고 안전했다. 파도는 일정했고, 바닥에 박힌 나사들은 반짝였다. 나무판 사이로 물이 들락거리는 것을 한동안 바라봤다. 길 옆에는 신형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포인트를 찾아 옮겨 다녔다. 모두 같은 곳을 찍는데도 화면은 전부 달라질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내 발걸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어디까지 가야 한다는 목표보다, 어디까지 걷고 싶은지가 더 중요했다.


데크가 끝나는 지점에서 모래로 내려와 잠깐 신발 끈을 다시 묶었다. 모래는 생각보다 따뜻했고, 바람은 세지도 약하지도 않았다. 바다를 정면으로 보니 마음이 억지로 고요해지는 게 아니라, 그냥 고요해졌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수평선을 한 번 찍고, 바로 주머니에 넣었다. 기록은 충분했고, 지금은 현장 쪽으로 더 기울고 싶었다.


시장으로 방향을 틀었다. 중앙시장 입구에서 튀김 냄새가 먼저 맞았다. 골목은 복잡하지 않았고, 방향표시가 친절했다. 회덮밥집, 닭강정집, 어묵집 줄이 각자 질서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구이집을 골랐다. 고등어 한 마리와 공깃밥, 김치 세 가지, 미역국이 나왔다. 혼자 먹는 식사는 빨리 끝낼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속도를 줄이고 씹는 횟수를 늘렸다. 밥을 미역국에 말아 한 숟가락 뜨고, 구운 살을 한 점 얹어 먹으니 몸에서 먼저 납득하는 감각이 왔다. 식사가 끝나갈 때쯤 사장님이 물을 추가로 따라주며 “바람이 좀 차요”라고 말했다. 한마디였지만 오늘의 날씨 요약으로 충분했다.


다시 바다. 동명항을 지나 등대전망대 쪽으로 올라갔다. 계단은 일정했고, 난간은 손에 잡히는 촉감이 좋았다. 위에 올라서자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새로 지은 호텔과 오래된 건물이 함께 시야에 섞였다. 카페 유리창은 커졌고, 항구의 배들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들썩였다. 예전에는 눈에 띄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길모퉁이마다 생긴 쓰레기 분리수거함, 자전거 거치대, 데크의 보수 구간. 도시가 ‘살림’을 배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것들이 사람의 오후를 덜 피곤하게 만든다.


오후엔 다시 걷기. 외옹치—대포항 구간을 속도를 조금 올려 걸었다. 해안 풍경은 반복처럼 보이면서도, 바위 결과 물색이 조금씩 달라졌다. 카메라를 들지 않고 걸으니 손이 가벼웠다. 가벼워진 손으로 난간을 잡을 때마다 균형 감각이 또렷해졌다. 중간에 벤치에서 물을 마시며 신발 안쪽에 들어간 모래를 털어냈다. 혼자 걸으면 이런 사소한 정비가 바로바로 된다. 누구에게 맞추지 않아도 되는 하루의 장점이었다.


이른 저녁은 대포항에서 먹었다. 호객을 피해 조용한 집을 골라 생선구이와 맑은 탕을 시켰다. 창밖으로 배가 천천히 돌아오는 게 보였다. 식당 안에서는 관광객들이 다음 날 설악산과 케이블카 이야기를 했다. 그 대화는 나와 상관없었지만, 소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낯선 도시에서 들리는 타인의 일정표는 오히려 배경음이 된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대 앞에서 포장한 오징어 한 마리를 샀다. 집에 돌아가서도 오늘의 냄새를 조금은 붙잡고 싶었다.


해가 기울자 불빛이 하나둘 켜졌다. 청초호 쪽으로 걸어 내려가 호수 가장자리에서 잠깐 앉았다. 바람이 조금 더 차가워졌고, 물 위로 작은 불빛들이 길을 만들었다. 손등으로 바람 온도를 확인했다. 너무 춥지 않았고, 오래 앉아도 괜찮을 정도였다. 주머니에서 버스표를 꺼내 시간과 승차장을 확인했다. 돌아가는 과정이 명확해져야 하루가 안정적으로 마무리된다. 그 확인만 끝나면 마음이 더 느슨해졌다.


터미널로 돌아가는 길, 골목에서 어린아이들이 킥보드를 타고 놀고 있었다. 횡단보도 앞에서는 모두 신호를 기다렸다. 이 도시의 저녁은 규칙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 점이 좋았다. 여행지의 좋은 인상은 풍경보다 생활의 질서에서 더 오래 남는다. 터미널 앞 편의점에서 물 하나를 사고 버스에 올랐다. 좌석에서 배낭을 벗어 발밑에 두고, 알림을 잠깐 켰다가 다시 껐다. 아직은 혼자였던 하루를 혼자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터널로 들어가기 전, 창밖 바다가 점점 어두워졌다. 오늘 하루의 동선이 머릿속에 간단히 정리됐다. 동서울—청초호—외옹치—시장—등대—대포—청초호—터미널.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그게 오늘의 핵심이었다. 사건 대신 과정, 이야기 대신 루틴을 고른 하루. 걸었고, 먹었고, 확인했고, 돌아왔다. 그 네 가지가 알맞게 배치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가벼움은 도피가 아니라 준비에 가깝다는 것도 알았다. 내일을 위한 체력과 정리된 머리를 들고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서울에 가까워지자 불빛이 촘촘해졌다. 핸드폰은 몇 번 떨렸지만 받지 않았다.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해 문을 지나며 아침과 같은 소리를 다시 들었다. 같은 문인데도 들릴 때의 의미가 달랐다. 아침의 문은 출발을 돕는 소리였고, 저녁의 문은 정리를 돕는 소리였다. 터미널 앞 횡단보도를 건너며 오늘을 한 줄로 적어보았다. ‘속초: 혼자 걸어도 충분했다.’ 이 한 줄이면 됐다. 사진보다 확실하게 남는 건 이런 짧은 문장 한 줄이라는 걸, 오늘은 분명히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