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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 Jun 26. 2023

참으로 애틋한 내 방

지금처럼 지금만큼의 충만함으로


퇴근길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늘 설레고 행복한 마음으로 가득한 귀갓길.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고, 내가 꿈꾸는 미래의 나를 만날 수도 있는 그 공간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하늘을 나는 듯이 가볍고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다. 이런 공간을 얼마나 바라고 또 바랐던가. 진심으로 ‘정말 좋다’는 말이면 된다. 다른 미사여구는 필요 없다. 이리도 애틋한 내 방은 지금의 집으로 이사오며 갖게 되었고 이제 막 3년 정도가 되었다.








학창 시절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머릿속만큼이나 복잡하고 무거웠다. 그러나 서둘러 집으로 가야 했다. 조금이라도 늑장을 부렸다가는 된통 야단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자주 화를 내고 집안일을 해놓지 않으면 욕을 먹어야 했고 툭하면 매를 맞아야 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일념하에 무척 바쁘게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우리 집은 서울 한복판에 있을 만한 집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 시골집 같은 집이었다. 삐걱대는 나무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당이랄 것도 없는 좁은 수돗가에서 설거지를 했고, 빨래도 했다. 그 집은 두 가족이 세를 들어 살았고, 우리는 안채에 살지 못했다. 바깥 채에 따로 떨어져 있는 작은 방 두 개가 우리 가족이 사용하는 방이었다. 마루도 없이 한 평남짓의 쪽마루가 놓인 조금 큰 방이 우리 집 안방이었다. 둘러앉아 밥을 먹으면 지나갈 자리도 없는 아주 좁고 형편없는 집에서 내 방이 없어서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했다 한들, 마음속 깊은 곳에 아쉽고 그리운 감정이 있었다 한들 절대 표현할 수 있는 집이 아니었고 받아줄 엄마도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주변 친구들은 이층 집에 일하는 아주머니가 주스를 쟁반에 이쁘고 담아 케이크나 빵과 함께 가져다주는 집에 살았기에 친구에게 놀러 가서 보고 느끼며 ‘우와 이렇게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엔 존재하는구나’ 하며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 친구들 집에서 만난 친구들의 엄마는 모두 나의 엄마와는 다른 표정과 목소리, 손짓 몸짓을 가지고 있었다. 확연히 다른 환경 속에 나를 낳아놓고 늘 인생을 원망하며 사는 건지 죽는 건지 모르겠다며 엉망으로 살아가는 우리 집이, 엄마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두렵고 어려웠고 싫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뭐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는 그런 집이었다.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짙은 회색빛으로 느껴졌고 그런 말들을 들으며 사는 나는 흑빛이 되어버릴 것만 같던 집이었다.

“내가 너희들을 버리지 않고 이렇게 사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알아?!!”
“니 아비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데.. 으이그 남편복 없는 년은 자식복도 없다더니.. 집도 제대로 치워놓지도 않고!!!”
“저거는 왜 저렇게 지 아비를 닮았지.. 저 전화받고 앉아있는 뒷모습도 똑같네.. 어휴..”


거친 엄마의 말과 행동은 점점 나와 엄마와의 거리를 몇 평 되지 않는 공간 속에서도 몇 십 킬로도 더 떨어뜨려 놓았다. 나를 향한 엄마의 무절제한 감정처리에 나는 지쳐갔고, 어느 날 짐을 싸서 무능함을 인정한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던 아빠의 뒷모습을 흐릿하게나마 떠올리며 나도 엄마의 곁을 떠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대학진학을 하지 못했고 엄마의 성화에 동사무소  아르바이트를 신청했다. 엄마의 부탁 덕분인지 취직이 되었지만 한 달 월급은 손에 쥐어보기만 하고 바로 엄마에게 상납해야 했다. 사는 게 정말 별로였다. 재미도 없었고 집에 들어가는 건 더 싫었다.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잿빛 가득한 표정으로 내 월급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엄마를. 그럴 때 만난 사람이 전남편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그에게서 찾으면 어떨까 하는 앞뒤 없는 선택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반대가 있었다. 집에 돈도 안 벌어다 주고 시집이나 가려고 한다며, 돈도 없어 보이는 사람을 골랐다며 하루종일 몰매를 맞기도 했지만, 그 어려움마저 이겨내고 내게 온 새 생명 덕분에 그 잿빛으로 가득했던 집을 떠나게 되었다.


허나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고 했던가, 산 넘어 산이라고도 했던가. 맞부딪혀 이겨낼 수 없었고 정면으로 승부할 줄 몰랐던 내 선택은 또 다른 숨 막히는 공간으로 장소만 이동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끔찍해하던 잿빛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두 아이가 나를 살게 해 주었고 아이들과 함께 나도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던 남편은 제대로 사랑받지 못했기에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매일매일을 노력하려는 나와 매사에 맞지 않았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나를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했더랬다. 변화할 틈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의 생활은 많은 문제를 남겼고 더 이상 유지되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의미도 남기지 못하며 15년 만에 혼자서 아이 둘과 제대로 된 삶을 살아보겠다 선택했었다.


그렇게 시작한 생활은 세 가족이 한 방에서 살았던 날들도 있었고, 방이 두 개인 집으로 이사 가던 날의 기쁨도 있었다. 언제나 아이들과 함께 좁은 공간에서 어깨 부딪히며 살았어도 ‘이게 사는 거지’ 싶게 살아온 시간들이었다. 그런 시간들을 차곡차곡 모아 지금의 집으로 이사오던 날은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지 50년이 훌쩍 넘은 시간만에 나만의 방으로 입성하게 된 것이다. 귀하고 또 귀할 수밖에, 고맙고 감사한 마음 가득일 수밖에 없지 않겠나 싶다.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요즘의 나는 나만의 공간에서 이렇게 글도 쓰고, 책을 읽고, 사람들과 책을 읽고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재미에 산다고 말한다. 앞으로도 더 나이 들어 60이 넘고 70이 되어도 나만의 공간에서 지금처럼, 지금만큼의 충만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



내 방 창문으로 내다본 하늘

내 방 창문 열어놓고 바라본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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