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엘 보내려고 깨우는데 초등학교 5학년 딸아이가 일어나다 말고 풀썩 주저앉았다.
나는 너무 놀라 “왜 그래?” 하며 물었고 “엄마~ 나 너무 힘들어..” 라며 아이는 울상을 지었다.
나는 바로 머리에 손을 얹었는데 아뿔싸! 엄청 뜨거워 열을 재니 39도가 넘었다.
순간 학교에 홍역이 유행이라는 학교 통신문이 떠올랐다.
병원을 가야 한다고 하니 딸아이는 갑자기 “엄마. 아빠 출근했어?” 라며 나를 바라봤다.
“일찍 현장에 간다고 나가셨는데 아빠한테 전화해서 얼른 들어오시라고 할게.”
아픈 아이가 찾으니 전화는 해야 하는데 어젯밤 처음으로 크게 다툰 일 때문에 전화하기가 정말 싫었다.
21살의 어린 나이에 살림을 시작했지만 한 달 한 달 살림을 하면 할수록 불투명한 삶이 아닌 명확한 미래를 그려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한 달 월급을 받아오면 적은 월급이었지만 편지 봉투에 생활비 명목을 나누어 넣어놓고 계획적으로 살아가려 노력했다. 다만 그런 노력이 나 혼자만의 노력이었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때 내가 바라던 부부는 대화를 통해 계획을 함께 세우며 미래를 그려나가는 것이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남편은 굳이 왜 그렇게 계획을 세우며 돈돈돈 하는지 모르겠다며 가정경제에 관심이 없었다. 돈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나에게 어디서 빌려 보라는 말도 자주 했다. 어린 나이에 결혼했고, 친구들은 모두 대학생, 친정엔 절대로 돈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남편이 너무 야속했다. 그러면서 결국 남편의 형제들이 보내준 돈으로 해결을 했고 그렇게 처리하는 것에 늘 당당했다. 어찌 되었든 처리했으니 되었다는 식이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결혼 전 나와 연애할 때에도 돈이 부족하면 누나나 형들에게 돈을 받아왔다는 것을. 어떤 이유에서든 남편은 경제개념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 그로 인해 벌어질 미래의 사건들은 어찌 보면 예견된 것이었을 수도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결혼 생활이 아닌 걸 깨달아 갈수록 속이 상했다. 남편의 결정으로 이뤄진 결혼생활은 늘 돈에 쪼들려 살았다. 돈 때문에 결혼을 결정한 게 아니었기에 조금 부족한 생활이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내 의사를 반영해 주길 바랐고 함께 하길 바란 것뿐이었다. 그러나 내 의사는 무시되었고 나의 결정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한 탓인 것 같아 속이 상했다. 그래서 어떻게라도 달라지고 싶었다. 첫째를 키우며 달라질 방법을 찾았지만 만만치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둘째를 임신했고 아이를 낳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까지도 고민했다. 그래도 둘째가 태어나면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했다. 하지만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몰랐고, 모든 것이 내 탓인 것만 같아 자책하는 날들도 많아졌다. 허나 남편이 달라지지 않아도 생활은 그럭저럭 꾸역꾸역 살아갔으며 아이들은 쑥쑥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남편은 조용하게 친구회사에 투자를 해볼까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탐탁지 않았다. 그 친구 회사가 그럴 가치가 없다 판단되어 내 생각을 전했다. 남편은 딱히 답이 없었고, 뭔지 모를 찜찜함만 남아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지 몇 달 후부터 남편은 자주 잠을 설치곤 했다. 새벽에 자다 깨어보면 자리에 없었다. 혹시나 하고 베란다를 내다보면 창밖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담배만 피워대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나고서야 투자를 했던 친구가 야반도주를 했다는 말을 내게 전했다. 아이 셋을 모두 데리고 아내와 함께 사라졌다는 말과 함께. 도대체 얼마나 투자를 해주었느냐고 물으니 눈도 마주치지 못했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 안 한다고 숨겨지는 것도 아닌데. 남편 퇴직금의 두 배 반이 넘는 금액을 투자, 보증을 서줬다는 말을 듣던 날,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눈앞이 까마득했다.
그때부터 나의 직장생활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의 직장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상황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면서 내가 직장 나가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생활비를 형제들에게 빌려오겠다나. 하지만 형제들이 은행도 아니고 결국 남편은 생활비를 제대로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리고 걱정했던 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로 나타났다. 차압으로 급여의 반을 은행이 가져갔다. 내가 직장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는지 대책도 없이 무작정 반대했던 건 뭐였을까 싶었다. 그렇게 차압이 진행된 지 6~7개월이 지날 무렵, 이젠 급여차압으로 진급도 무산되었다며 그만두어야겠다는 말을 했다. 정말 몽둥이가 있으면 두들겨 패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해주고 싶었다. 그의 직업은 공무원이었기에 힘들어도 좀 참으라고, 이렇게 문제를 키운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그냥 다녀줘야 하는 게 아니냐며 나중엔 부탁까지 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내 말을 들어주길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상의 없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퇴직을 결정하고 받은 퇴직금으로는 사업을 시작했지만 누구나 그렇게 해서 돈을 벌면 세상 살아가기 얼마나 쉽겠는가. 그래도 나는 내가 직장 다녀 생활하고 사업은 사업대로 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직장을 그만두고 이사를 내려오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지방의 사업이 잘 되어간다며 가족모두 내려가서 살기를 원했다. 남편은 한 번 말을 꺼내면 들어줄 때까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이번이 남편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는 마지막이라는 다짐을 받아내고서야 이사를 했다.
그때가 바로 첫째가 초등학교 5학년, 둘째가 유치원생일 때였다. 지방에 이사간지 얼마되지 않아 생활비가 없어 보일러를 틀지 못했고, 가스레인지를 쓸 수 없어 휴대용 버너로 겨우 밥을 해 먹었다. 빈곤해져 가는 생활 앞에서 무력해지는 나를 만나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때 찾아낸 것이 군청에서 무료로 진행하는 컴퓨터 교육이었다. 2개월 동안 초급/중급을 배웠고 교육이 끝날 즈음 선생님의 소개로 한자가 가득한 옛날 신문을 일반 A4 용지에 옮겨 놓고, 3.5 플로피 디스켓에 저장해서 저장한 용량만큼 비용을 받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가스레인지로 밥을 했고 보일러에 기름도 사서 넣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막막함에 마음이 답답했다.
첫째가 홍역을 앓느라 고열에 시달리며 아빠를 찾던 날, 사실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버릴 마음이었다. 전날 동생 카드값을 넣어주지 않으면 연체가 된다는 언짢은 전화를 받았다. 그 내용을 전하니 그만 재촉하라며 화를 냈고, 아주 큰 다툼이 벌어졌다. “너네 집에서는 내가 이렇게 사업한다는데 해준 게 뭐가 있냐. 고작 이 카드값 가지고 왜 난리야! 준다고 주면 될 거 아냐!”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날 처음으로 내 목소리는 남편목소리를 넘어 집밖으로 울려 퍼졌고 ‘아 이건 아니구나. 이런 마음으로는 살 수 없겠구나’ 라며. 그리고 아이들 방으로 갔다. 처음으로 크게 다퉜고 이런 생활을 지속해야 하나, 아이들은 어쩌나 고민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날이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첫째가 내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고열로 쓰러져 있는 아이를 두고 어디를 간단 말인가. 엄마가 곁에 있어줘야 했다.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아이라서 그런 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결혼을 하게 되었던 그 언젠가처럼.
그로부터 4년 후 어렵게 이혼을 결정하고 지난했던 결혼 생활을 끝냈다. 그제야 모든 결정을 내가 내리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지는 삶은 누구를 원망하며 속수무책으로 있지 않아도 되니 그게 바로 삶 같았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아이 둘과 함께여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렇다. 고작 이렇게 살아가려고 결혼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남편을 선택했던 그 순간들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그때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순간들이 있었기에 내게 두 아이가 찾아왔고 내가 엄마라는 자리를 얻게 되었다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