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는 하나만으로도 충분해
몇 번째 생일인지 이제는 숫자를 하나하나 헤아리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케이크 위에는 초를 나이만큼 꽂지 않고 세 개 정도만 꽂아 불을 밝힌다.
이제 내게 생일은 몇 살이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날이 아니라,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채워갈 것인가를 생각하는 날이 되었다.
아마도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아들이 있기에 나는 더 자주 ‘지금, 여기’를 생각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아들을 하늘로 떠나보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오늘이 얼마나 귀한지,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웃고, 별일 없는 하루를 함께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그래서 나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웃을 수 있을 때 많이 웃고, 함께 할 수 있을 때 더 많이 함께하고 싶다.
생일은 그저 가볍게 지나칠 수만은 없는 날이기도 하다.
엄마가 되어본 사람은 안다. 한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그래서 생일이 오면 나를 낳느라 애썼을 엄마를 떠올리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나를 엄마로 둔 딸의 마음도 가만히 헤아리게 된다.
올해 내 생일은 월요일이다. 평일이라 함께하지 못하니 하루 전인 일요일, 가족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조용하고 편안한 식당에서 음식이 나올 때마다 딸아이는 내 입맛에 맞는지, 맛은 어떤지 계속 나를 살폈다.
“엄마, 이건 어때?”
“엄마, 이건 맛있어?”
이런 다정한 물음들이 참 고마웠다.
그리고 늘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챙겨 와 촛불을 밝혀주는 동생과도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마음이 참 따뜻했다.
동생을 떠올리면 오래전 시간이 함께 떠오른다.
아마 1993년쯤이었을 것이다. 대학생이 된 동생이 조심스럽게 내게 도움을 청해왔던 날.
엄마와 관계가 좋지 않아 마음을 붙들지 못하고 힘들게 지내고 있다며, 학교에서 집이 멀다는 핑계로라도 우리 집에서 지내게 해달라고 엄마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느냐고 조심스레 물어왔었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고 집도 좁았지만, 나는 쉽지 않게 내민 그 손을 꼭 잡아주고 싶었다.
그렇게 함께 살았던 시간이 7년쯤 되었던 것 같다.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니며, 내가 해준 밥을 먹으며 살았던 그 시간들을 동생은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었다.
“언니가 해준 밥 먹고 살았던 그 시간이 너무 따뜻하고 고마웠어.”
“언니는 내게 엄마 같은 존재야.”
그 말과 함께 건네주던 생일 케이크와 편지, 그리고 용돈 봉투.
처음 생일 선물을 받았던 날, 나는 얼마나 울컥했던지.
지금도 동생은 내 마음 한켠을 뭉근하게 데워주는 존재다.
그리고 이제 또 하나의 시간이 우리 가족에게 다가오고 있다.
작년 6월 결혼한 딸아이에게 작고 귀한 새 생명이 찾아왔다. 올해가 가기 전에 딸도 엄마가 된다. 입덧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와중에도 엄마의 생일을 챙겨주는 딸.
그리고 그런 딸과 함께 내게 어떤 음식을 대접하면 좋을지 식당을 열심히 알아봐 주는 사위.
그 둘도 이제 부모가 된다. 차분한 두 사람에게서 태어날 아이는 어떤 표정으로 세상을 바라볼까. 어떤 마음을 가진 아이로 자랄까.
나는 벌써부터 그 작은 생명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이 된다.
올해 10월의 어느 날, 내가 할머니가 되는 순간을 가만히 떠올려본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나는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을까.
인생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 있고, 예상치 못한 일들도 있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믿고 싶다. 세상은 살아볼 만한 곳이라고.
태어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귀한 일이고, 한 사람의 삶은 끝까지 응원받아 마땅한 것이라고.
그래서 곧 태어날 새 생명도, 그리고 어느덧 예순을 바라보는 나 자신도 함께 응원해주고 싶다.
내일은 나를 낳느라 애썼을 엄마에게 전화를 드릴 생각이다. 한때는 덜커덩거리던 우리 관계도 이제는 많이 편안해졌다. 그래서 더 다행이다.
생일이 되면 나는 다시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의 딸이었고, 누군가의 엄마였으며, 이제는 누군가의 할머니가 되어간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지만 결국 남는 건 함께했던 순간과 그 순간의 마음들 인지도 모르겠다.
올해의 생일도 그 마음들을 가만히 품으며 조용히, 감사하게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