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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샤인 Nov 19. 2022

열받아서 시작한 사업

배신 당한 사랑





나는 꿈꾸는 것을 좋아한다. 고로 일 벌이는 것도 아주 잘한다.


중, 고등학교 때는 끼가 다분해서 무대에 오르는 것을 좋아해 배우가 되고 싶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보다 현실적인 꿈을 찾아 웹디자이너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HTML언어를 배우다가 빠르게 접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컴퓨터 그래픽스 운용기능사를 취득하며 숙련된 일러스트와 포토샵 기술을 이용해서 고등학교 졸업 후엔 광고기획소에 다녔다. 매일 기계처럼 반복되는 명함, 스티커, 메뉴판, 팸플릿 디자인을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하다가 질려서 접었다. 광고주는 고객이고 고객의 요구에 맞추는 게 당연하거늘 어린 시절 나는 꽤나 수준 높은 양 촌스러운 디자인이 싫다며 나와 버린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작가를 꿈꿨다. 책을 읽고, 글을 끄적이는 것을 좋아해서였다. 서울에 문예창작원에 취업을 해서 문하생 생활을 했다. 나는 글에 재능이 없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글 재능은 타고나는 사람도 있지만 쓸수록 느는 사람도 있다며 고집스럽게 매달렸다. 하지만 번번이 등단에 실패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해져 일반 사무직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그렇게 일반 사무원으로 살아가는데 도저히 넘치는 끼를 주체할 수가 없어서 내가 직접 쓴 개그 극본으로 코미디언을 준비했다. 글 쓰는 재능은 있지만 웃기는 재능은 없었던 나는 KBS 공채 개그맨 시험에도 낙방했다. 함께 대학로 공연을 준비했던 친구들 중 한 명은 공채 개그맨이 되었지만 나머지는 모두 자신의 삶을 찾아 흩어졌다.


나는 그렇게 그저 그런 사람이라는 명함을 들고 살았다. 29살에 운명의 짝인 신랑을 만났고, 그가 나를 평생 지켜주겠다고 하는 말에 눈에 콩깍지가 씌어 결혼했다. 10년이 흐른 지금, 콩깍지는 벗겨졌지만 다행히 좋은 사람이어서 고맙다. 신랑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좀 가난한 사람이어서 내가 함께 돈을 벌어 가정을 꾸려야 했다. 아이를 낳고 백일을 넘기자마자 기는 것도 어려운 꼬물거리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회사를 다녔다. 나이는 많은데 뭐하나 제대로 된 경력이 없어서 다닐 수 있는 곳이라곤 일반 사무직이었다. 명함도 만들어 주지 않는 미미한 업무를 하는 사람이었다. 사무실 청소를 하고 직원들이 쌓아둔 컵을 설거지하고 밥을 시키고 치우고 소소한 경비의 영수증을 챙겨서 정리해 회계부서에 보고하는 사람이었다. 간혹 몇백 원이 맞지 않으면 내 돈으로 메꿔서 시시비비의 카오스에 빠지는 것을 막았다. 겨우 170만 원 받는 사람이 말이다. 


다른 건 다 좋았다. 하지만 자존심을 건드는 것은 아무리 하찮은 업무를 하는 사람일지라도 참을 수 없는 법이다. 나는 회사에 최선을 다했다. 열심히 하면 회사 안에서 키워주겠다고 하는 상사의 말에 정말 한시도 딴짓 없이 열정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회사가 커지고 직무조정이 생길 즈음 나는 크지 못하고, 대학교를 나오고 경력이 일정하고 화려한 또래의 여자에게 밀려 그녀의 부하직원이 되었다. 그때 내 자격지심이 폭발했다. 대학을 나오지도, 경력이 일정하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하려는 의지 하나는 제대로 보였던 성실한 나였는데 결국엔 그들의 채점지에선 이미 낙제였던 거였다. 나는 퇴사를 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시작한 사업


사랑에 배신당하고 내쳐진 사람이 오롯이 선, 진짜 현실이었다. 비로소 게임이 시작된 느낌이었다. 꿈속에서만 살던 내가 현실로 등 떠밀려 나온 느낌. 하지만 나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고, 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돈 되는 재능들을 다 끄집어 내 보았다. 기술이라는 것으로 돈을 벌었던 것은 광고기획소에 다녔던 게 거의 전부였다. 나는 블로그를 개설해서 명함을 만들어 올렸다. 상담채널도 만들어놓고 문의를 받았다. 처음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계속 올리자 한 달여 만에 문의가 들어왔다. 명함 제작을 2만 원에 했다. 첫 매출이었다. (그때의 고객님은 아직까지도 내게 연락을 해오신다. 감사하다.) 제작한 것들은 제작 사례로 다시 공유했다. 그렇게 샘플과 사례가 쌓여가니 자연스럽게 문의가 늘어났다. 처음 몇달은 월 매출이 30만 원도 되지 않았지만 매출은 점차로 늘어났고, 이 일을 계속해도 되겠다는 희망을 보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보내는 주소를 집주소로 하다 보니 어떤 상황이 되면 사업장 주소가 집이냐는 질문을 받게 되는 것! 그래서 사무실을 계약해야겠다고 신랑에게 이야기했다. 그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무리한 월세였지만 내 인생에 한 번쯤은 베팅 같은 것을 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호기롭게 말하는 나를 신랑은, 믿어주었다. 그래, 해봐. 당신도 멋지게 살아 봐.









사무실 2년 계약 '끝날 즈음 상황을 봐서 고스톱 할게!'


"계약한 2년 동안 정말 열심히 할 거야. 그때까지 매출이 희망적이지 않다면 인정하고 접을게. 하지만 방향이 보인다면 확장할 거야." 그런 당찬 말을 쏟아냈었다. 사실은 불안했었고, 무서웠다. 사무실 계약에는 많은 돈이 들었기 때문이다. 없는 돈을 대출받아가며 보증금을 걸고, 사무실 가구와 기계를 샀다. 돈이 물 쓰듯이 빠져나갔다. 통장 잔고가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었고, 믿어야 했다. 가진 건 오직 나 스스로의 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2년 동안 성장했다. 현재 함께 일하는 직원은 2명이 있고, 매출도 첫해보다 눈에 띄게 늘었다. 정말 밥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일만 하는 간절함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몸무게는 52kg에서 46kg가 되어 볼이 움푹 패었지만 내가 얻은 것들과 바꿨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 살이야 다시 찌우면 된다. 처음 하는 사업이고 주변에 고민을 상담할 사업하는 지인도 없어 때론 잠도 못 들 때가 많지만, 맞닥뜨리고 해결하며 얻는 경험치가 상당하다. 2년 간 성장한 내 모습과 회사를 보는 게 무엇보다 가장 행복하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아플지 두렵기도 하지만, 그만큼 성장할 것이기 때문에 설렌다. 






두렵고 설레는 사업일지를 매주 2회씩 업데이트해나가려고 한다. 내 좌충우돌 사업일지가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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