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디자이너라는 말로 나를 소개하는 것도 겸연쩍다. 디자이너라기엔 눈이 번쩍 뜨일만한 실력이 없다. 디자인 편집자라고 하는 게 적확하다. 그렇지만 디자인 편집을 하는 사람은 한 번에 그 정체성이 통하지 않는다. 정확히 하는 일이 뭔가? 인쇄물 디자이너? 인쇄물 편집자? 아니, 명함, 현수막, 전단지 기획 편집자? 무슨 말을 갖다 붙여도 뚜렷하게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 나는 찌라시 디자이너다.
나는 디자인 관련한 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다. 실업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사무실에서 쓰는 프로그램들을 익혔다. 과이름은 사무자동화과였다. 아래 한글, 워드프로세서, 엑셀, 전산프로그램 같은 것들을 익혔다. 그 프로그램들을 잘 활용한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 졸업 후, 별로 써먹을 일이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너무 평이한 것을 배우는 것 같아 스스로 디자이너가 되려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컴퓨터그래픽스운용기능사 자격증 과정에 등록해서 다녔다. 그때 당시에 월 40만 원의 비싼 학원비였다. 하지만 기술이 없어 이리저리 몸으로 공사판을 전전하시던 아버지는, 일찍이 공부 머리는 없는 둘째 딸이 기술을 배우길 원하셨다. 그래서였는지 아버지의 벌이를 생각하면 큰돈이었지만 묵묵히 공부를 뒷바라지해 주셨다.
학교에서 꽤나 까불고 돌아다니던 고등학생 때의 나는 사실 딴 맘을 품고 있었다. 학원은 오후 5시에 시작해서 8시에 끝났다. 터미널의 한 구석에 위치하고 있던 학원에서 어둑한 거리로 나오면 터미널 주변으로 몰려든 노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과 잠시라도 노는 게 좋았다. 공부는 그다음이었다. 그래서 종종 학원을 빼먹고 놀자는 유혹에 넘어가 학원을 빼먹는 날이면 어김없이 집에 들어가자마자 두들겨 맞았다. 난 맷집이 좋은 아이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춘기의 몸은 좀 다르게 생겨먹은 듯했다. 신나게 놀고 온 에너지가 충만해서 아버지의 매가 맞을만했다. 그렇게 나의 방황을 도와준 디자인학원은 고등학생 때의 추억의 장소로 남아 있다.
놀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꼭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이 그렇듯.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딴짓을 했다. 다른 친구들 모두 학교 공부를 하고 있는데 혼자 디자인 관련 책을 펴놓았다. 나는 디자이너가 될 거라고 했다. 사실, 멋진 그래픽 잡지들을 펼쳐놓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그냥 멋지고 싶었다. 그래도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학원을 다니며 전혀 배운 게 없진 않았다. 1년을 조금 넘게 다니고는 컴퓨터그래픽스운용기능사를 취득했다.
막상 자격증을 따놓고서는 취업은 다른 쪽으로 했다. 일반 사무실 경리, 돈 많이 주는 생산직 사원, 박봉이어도 재밌게 일할 수 있는 패스트푸드점 매니저. 그렇게 다양한 일을 하다가 전문적으로 경력을 쌓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들어 기술을 살려 조그만 광고기획소에서 편집일을 시작했다. 명함, 현수막, 버스광고디자인, 전단지, 메뉴판, 카탈로그 등을 만들었다. 모두 영업을 해서 일감을 가지고 온 실장님의 지시하에 그저 눈에 띄는 배치만 하는 찌라시 디자이너였다.
실장님은 나의 등 뒤에 서서 팔짱을 끼고서 툭툭 던지는 말로 지시했다. '크게. 크게. 더 크게.' 혹은 '더 노랗게, 더 빨갛게, 더 두껍게'와 같은 주문이 가장 많았다. 내가 편집한 디자인은 조악했다. 모든 텍스트들이 전부 존재감을 뿜어내서 어느 것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았지만, 실장님은 박수를 치며 흡족해했다. 나는 지하실의 조그만 편집실에서 실장님이 태우는 담배 연기를 함께 마시며 조용히 말라갔다. 그곳에서 용케도 잘 견디며 많은 포트폴리오를 만들었지만 모두 남에게 보여주기엔 창피해서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것이었다. 실력의 향상이나 안목의 깊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