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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sh Mar 16. 2020

보글보글, 라면

 얼마 전 피부과를 다녀왔다. 이 시국에 밖에 나갈 일이 당최 없다보니 매일 집에서 라면만 끓여먹다가 두드러기가 점점 심해진 탓이다. 몸에 안 좋은 걸 알면서도 매일같이 라면을 끓여먹었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그립다. 라면과 잠시동안 멀어져야 한다니, 아! 슬프다. 나의 혀 끝은 지금도 라면의 짭짤한 그 맛을 그리워한다. 오늘 저녁에 먹었던 멸치볶음은 그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다. 물이 끓으면 스프를 넣고 곧바로 딱딱한 면을 투하, 계란을 사정없이 풀고 난 후(나는 계란을 푸는 것을 좋아한다. 악플 금지) 면을 아래 위로 끈질기게 괴롭히다 보면 어느새 주황 빛깔의 라면이 완성이다. 임금님 비단도 라면 빛깔에는 못 미친다, 아마.


 다들 라면을 어떻게 먹는지 궁금하다. 먼저 나는 건더기 스프를 '극 불호' 한다. 차라리 생 파를 어슷썰어서 고명으로 얹어 먹으면 모를까, 꾸릿꾸릿한 냄새가 나는 파 건더기는 나에게는 정말 맛없다. 계란도 확 풀어버리는 걸 좋아한다. 써 놓고 보니 내 스타일은 주류에서 한참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게 제일 맛있는데.. 라면의 짠 맛에 때때로 매콤한 맛을 더하고 싶을 땐 고추장을 반 스푼 정도 넣는다. 마치 매운탕 남은 국물에 라면사리를 추가한 듯한 느낌이라 이것 또한 별미다. 그리고 나는 특이한 라면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삼양라면, 진라면 순한맛, 그리고 열라면이 최고다. 신라면은 밀가루 맛이 심해서 그닥이다.


 집에서는 저렇게 해 먹는다. 그렇지만 라면은 한국인에게 조금 특별한 음식이기에, 집 밖에서도 우리는 라면을 찾는다. 그렇다면, 과연 라면은 언제-어디서 먹어야 가장 맛있을까? 각자의 추억 속에 자리잡은 최고의 라면은 무엇이었는지, 지금부터 한번 끄집어내볼 시간이다.



 집에서 끓여먹는 라면이 가장 맛있다는 사람들도 있다. 가장 스탠다드한 방식. 그러나 재미는 없다. 펜션이나 캠핑장에서 친구들, 가족들과 같이 왁자지껄 요란하게 라면을 먹을 때는 꽤 재밌다. 다 불어터진 라면을 그릇이 아닌 종이컵에 담는 것도 웃기다. 이 때 라면의 '불어터짐'은 용서가 된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홍차와 마들렌을 먹고 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집에서 라면을 실수로 불어터지게 끓였을 때 나는 친구들과의 추억을 떠올린다. 펜션 방에서 술을 진탕 마시다가 새벽까지 버틴 소수의 '승자들'끼리 먹는 해장 라면도 별미다. 이 때의 라면은 '추억'이 된다. 라면은 자기도 모르게 여러 사람의 추억을 담고 있었다.


 김밥천국에서 사먹는 라면은 그저 그렇다. 왜냐하면 라면에 대해 우리는 모두 각자만의 고유한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불특정 다수를 위해 끓이다보니 내 맘에 쏙 들지 못하고 항상 2% 부족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먹는 '컵라면'은 맛있다. 컵라면은 배고픈 이들의 소중한 안식이다. 천원에서 이천원이면 푸짐한 라면 한 그릇을 간편하게 즐길 수 있다. 용돈을 받는 고등학생, 취준생, 청소 노동자, 새벽 근무자, 어르신 모두 컵라면을 좋아한다. 컵라면은 겸손의 음식이다. 컵라면을 먹는 장소는 항상 비좁다. 엉덩이보다 작은 편의점 의자나, 화장실보다 작은 청소 노동자의 휴식 공간이나, 대학생의 고시원 방은 그 사람에게 겸손을 강요한다. 컵라면은 퍽퍽한 삶의 반영일까. 컵라면이 익는 시간은 3분 정도로 매우 짧다. 마치 우리에게 '빨리 먹고 하던 일 해야지' 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19살 김군의 가방에는 육개장 컵라면이 들어있었다. 그와 같은 이들에게 라면은 기호품이 아니다. 강요된 삶이다. 생계를 위한 라면. 라면의 짠 맛이 눈가에 아려온다.



 군대에서 먹는 '뽀글이'를 빼먹을 뻔했다. 군대에서 몰래 먹는 건 무엇이든 맛있다. 특히 라면은 더 맛있다. 훈련 때 보온병에 몰래 뜨거운 물을 담아와서 라면 봉지에 붓는다. 그 순간, 모두에게 익숙한 라면의 '그 냄새'가 코 끝을 강타한다. 참 맛있었지. 이 외에도 라면을 먹는 상황은 무수하게 많다. 해장으로 먹는 라면, 찌개에 넣어먹는 사리면, 새벽에 몰래 끓여먹는 라면 등.... 나는 이것들을 떠올리며 동시에 사람을 떠올린다. 그 때 나는 누구와 라면을 먹었지. 나는 누구에게 라면을 끓여주고 있었지. 기억의 연쇄작용이 추억을 끄집어낸다. 참, 특별한 음식인 것은 분명하다. 다음 주면 처방받은 약을 다 먹는다. 고통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주말이 되면 나는 늘 했던 방식으로 라면을 끓일 것이다. 봉지를 뜯고, 건더기 스프는 버리고, 계란은 하염없이 풀어제끼고, 살짝 꼬들꼬들하게 하면 완성. 고통의 일주일 동안 이 글을 읽는 당신만이라도 라면을 맘껏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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