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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sh Apr 01. 2020

시금치냐 오이냐, 김밥 논쟁

 프레디 머큐리처럼 혼자서 존재감을 뿜뿜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와도 잘 녹아드는 조세호나 이광수 같이 호감형인 사람들도 있다. 음식에선 김밥이 바로 그러한 존재다. 적당히 통통하고 매끈매끈한 참기름 빛깔을 자랑하는 김밥은 어느 음식과도 좋은 호흡을 자랑한다. 떡볶이 국물에 찍어먹는 김밥, 김밥천국의 경양식 돈까스와 같이 먹는 김밥, 찐득찐득한 쫄면 면발에 싸먹는 김밥…. 혹은 편의점 부동의 인기 1위(내 기준) 조합인 컵라면과 삼각김밥 콤비도 있다. 김밥은 겸손해서 그 자신보다는 같이 있는 친구를 돋보이게 해준다. 라면은 파스타나 짜장면에게 함부로 나서기엔 약한 존재지만 김밥과 만난 라면은 면발의 왕좌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 말하자면 김밥의 섭정이다.


이런 떡볶이 국물에 김밥을 푹 찍어먹고 싶다. 바로 지금...


 나는 김밥을 진짜 좋아한다. 하지만 여기에 단서조항을 하나 넣겠다. '시금치가 들어가지 않은' 김밥만을 좋아한다. 이 시점에서 뒤로가기를 누를 당신이 보인다... 그러나 김밥에 시금치는 개인적으로 너무 별로다. 김밥의 재료를 한번 살펴보자. 김과 밥은 기본이요, 단무지와 햄 또한 필수나 다름없다. 햄 정도는 비건이나 채식주의자를 위해선 대체 가능하다고 본다. 황금빛 계란 지단은 오로지 김밥을 위해서 탄생했다고 말하고 싶다. 당근 볶음과 우엉 조림, 맛살은 기호에 따라 선호하는 것을 넣으면 된다. 여기까지는 논쟁이 적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시금치를 넣으려는 당신의 손을 당장 뿌리치고 싶다. "시금치를 굳이...?"


 시금치는 일단 쓰다. 쓴 맛은 김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거기에 너무나도 질겨서 김밥을 씹으면 시금치의 식감이 정말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거기에 시금치는 따로 볶아내야 하니 오이보다 손질이 까다롭다! 오이는 그저 썰어내면 끝이다. 더불어 오이의 아삭거리는 식감은 단무지 하나로 아쉬울 뻔 했던 김밥의 텍스쳐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김밥이 락 밴드라면 오이는 베이시스트거나 기타리스트가 될 수 있다. 반면 시금치는 락 밴드에서 난데없이 리코더를 부는 것과 같다. 시금치는 시금치 무침이나 시금치 볶음처럼 따로 밥 반찬으로 올리는 것이 더욱 좋을 듯 하다. 세상에 오이를 싫어하는 '오이 헤이러'가 많은 것은 잘 알지만, 그래도 나는 시금치보단 오이가 10배 정도 낫다. 정말 개인적인 취향이니 존중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논쟁은 잠깐 제쳐놓기로. 김밥에 대해 더 탐구해보자. 김밥은 정말 맛있다. 그러나 자극적인 입맛을 가진 한국인에게 김밥은 한끼 식사로는 살짝 아쉽다. 김밥 내의 모순이다. 여기서 김밥은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새로운 김밥을 잔뜩 쏟아내고야 만다. 샐러드 김밥, 제육 김밥, 참치 묵은지 김밥, 소고기 치즈 김밥 등 김밥은 김밥천국이라는 작은 시골에서 세계 곳곳으로의 진출을 감행했다. 몸값은 일반 김밥보다 조금 더 나간다. 나는 가끔 '바푸리'라는 김밥 집에서 숯불갈비 김밥을 먹곤 하는데, 내가 먹을 당시에 그 김밥은 4000원이었다. 옛날에 김밥 한 줄이 천원이었던 걸 생각하면, 지금의 김밥 가격은 슬프다. 서민 물가 상승을 몸소 체감하려면 김밥 가격이 얼만지 보면 된다. 지금 김밥은 대부분 2500원이다.


김밥은 끼니를 감당할 수 있는 음식이지만, 끼니를 해결하는 밥 먹기의 엄숙성에서 벗어나 있다. 김밥은 끼니이면서도 끼니가 아닌 것처럼 가벼운 밥 먹기로 끼니를 때울 수가 있다. 김밥으로 끼니를 때울 때, 나는 끼니를 때우고 있다는 삶의 하중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김밥의 가벼움은 서늘하다. 크고 뚱뚱한 김밥은 이 같은 정서적 사명을 수행하지 못한다. 뚱뚱한 김밥의 옆구리가 터져서, 토막난 내용물이 쏟아져나올 때 나는 먹고산다는 것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비애를 느낀다.

(라면을 끓이며, 김훈)



 집에서 김밥을 싸먹는 행위는 대체로 즐겁다. 가족끼리 오손도손 모여 김밥을 말 때 내 역할은 대체로 계란 지단이나 햄을 몰래 빼먹는 것이었다. 속재료를 그릇 위에 가득 올려놓으면 김밥을 마는 사람 모르게 몰래 햄을 가져가 오물오물 먹었던 추억이 떠오른다. 썰지 않고 통째로 먹는 김밥도 집에서 먹는 자의 특권이었다. 김치를 넣어달라며 나만의 김밥을 위해 떼를 쓴 적도 있다. 가족이 점점 해체되는 요즘에는 김밥 마는 사람은 김밥천국에만 있는 것 같다. 1인 가구는 김밥을 스스로 싸 먹지 않는다. 편의점 김밥은 스테디셀러다. 편의점 김밥을 먹는 행위는 즐거움보다는 끼니를 때우는 행위와 맞닿아 있다. 전자레인지에 데워진 편의점 김밥은 쭈글쭈글하고 못난 식감을 가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살 때면 편의점 김밥을 먹어야 한다. 김밥을 마는 김밥천국 아주머니의 시간도 아까운 나머지 이미 썰어져있는 편의점 김밥을 먹으라며 우리를 재촉하는 걸까. 살아가기가 힘들 때 먹는 편의점 김밥과 컵라면은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맛있다.


 중요한 논제가 하나 더 남아있다. 쫄면에는 김밥인가 만두인가? 당신의 생각이 궁금하다. 따끈따끈한 찐만두를 한입 베어먹고 차가운 쫄면을 입 안에 들이미는 것도 참 별미다. 그렇다고 해서 쫄면에 만두를 선택하기에는 김밥이 서운해한다. 김밥천국의 대장급 메뉴인 '스페셜세트'를 보라. 돈까스와 쫄면, 김밥이 같이 나온다. 쫄면과 김밥은 족보가 있는 조합이란 말씀이다. 쓸데없는 데 왜 머리를 쓰냐고? 삶이 너무 퍽퍽한데, 가끔은 쓸데없이 살고 싶다. 김밥 먹는 건 쓸모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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