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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sh Apr 21. 2020

만년 2위, 닭도리탕

 시뻘건 국물이 자작하게 끓는다. 매콤한 냄새가 기분좋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지금쯤이면 익었겠지? 되직한 국물에서 닭고기 한 덩이를 국자로 퍼낸다(감자도 자연스레 따라오니, 좋다). 젓가락으로 닭고기를 먹기 좋게 찢고 나서 숟가락으로 그 위에 다시 국물을 적신다. 속까지 양념이 배도록! 따끈한 밥과 함께 이제 한바탕 즐길 시간이다. 맛있게 잘 끓인 닭도리탕,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다.


필자는 참고로 닭도리탕의 '도리탕'이 일본식 표현이 아닌 '도려낸다'라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인지하고 있다.


  쫄깃쫄깃한 닭고기 살, 포슬포슬하게 잘 익은 감자 그리고 기호에 따라서 라면 사리까지. 매콤한 국물과 최고의 호흡을 자랑하는 라인업이다. 건더기를 다 먹고 나면 남은 국물에 밥, 김가루를 볶고 참기름 세 스푼으로 마무리하는 '볶음밥'도 참 별미다. 매운 음식을 사랑하는 한국인들이 애정할 수 밖에 없는 닭도리탕. 그러나 닭도리탕은, 애석하게도 닭 요리 분야에서 만년 2위의 불명예를 차지하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지금부터 닭도리탕의 경쟁자들을 하나하나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야식의 대명사. 대한민국은 OO 공화국이다, 라며 한 나라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그 음식. '치킨'이다. 닭도리탕은 아마 평생동안 치킨을 이기지 못할 거다. 야식의 대명사. 양념, 후라이드, 간장 치킨, 파닭…. 치킨만큼 전 세대에 걸쳐서 사랑받는 음식은 아마 찾기 힘들 것이다. 배달 어플을 들어가보면 치킨은 메인의 한 배너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닭도리탕은 하위 메뉴에 불과하다. 더불어 맥주 안주 분야에서 치킨은 모든 음식을 압도한다. 야식과 맥주 안주에서 닭도리탕은 치킨에 졌다. 아주 처참하게...



 치킨한테는 졌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어떨까? 우리는 국가적으로 닭을 먹는 날이 정해져 있다. 바로 '복날'. 복날에는 치킨보다는 좀 더 원형적인(?) 닭 요리가 땡긴다. 기운 차리기 위해 먹는 복날음식에 밀가루 덩어리인 치킨은 불합격. 그러나 이 때도 닭도리탕은 '백숙'에게 밀린다. 뽀얀 국물에 갖가지 한약재를 넣고 푹 끓인 백숙 한그릇은 복날 전용 특식이다. 복날에는 백숙을 먹지만 닭도리탕은... 아무도 찾지 않는다. 아! 닭도리탕은 도대체 누가 찾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해외 수출이다. 내수에서 어렵다면 나라 바깥으로 눈을 돌려보는 것도 좋겠다. K팝, K뷰티의 인기에 힘입어 K푸드도 외국 사람들에게 꽤나 '힙한'것으로 여겨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미 '치즈 닭갈비'가 한국의 주요 한류 시장인 일본을 먼저 강타해버렸다. 2017년 일본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일본 유행어 대상' 상품 부문에서 무려 한국의 '치즈 닭갈비'가 1위를 차지했다. 일본인들에게 치즈 닭갈비는 그리 맵지도 않고, 치즈와 양념의 단짠단짠 조합이 뿜뿜하는 아주 매력적인 음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매콤하고 강렬한 닭도리탕은 외국 사람들에게는 너무 매운가 보다. 더욱이 '묽지도 않고 너무 되직하지도 않은' 닭도리탕의 국물에 치즈를 올리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찜닭, 닭갈비 너네는 치즈 덕분에 살아남은 거야.



 만년 2위, 닭도리탕. 모든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기에는 너무 자극적인 음식일까. 하지만 닭도리탕은 '2위'라는 포지션이 오히려 좋은 별명일수도 있다. 나는 닭도리탕을 한국인의 훌륭한 '소울 푸드'라고 정의하고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닭도리탕을 밖에서보다는 '집에서' 더 많이 먹어봤을 것이다.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끓여주는 닭도리탕. 모든 종류의 찌개를 사시사철 감당하는, 우리 집의 익숙한 '그 냄비'. '그 냄비'에 끓여진 우리 집만의 닭도리탕. 어느 집은 국물이 많게, 어느 집은 떡볶이처럼 국물을 완전 졸여서 끓인다. 제 집마다의 스타일이 다 다르다. 음식은 이야기를 담는다. 집에서 먹던 닭도리탕과 밖에서 사먹는 닭도리탕의 맛은 잘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밖에서 닭도리탕을 사먹기 꺼려지는 것일까. '우리집 닭도리탕이 최고야'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닭도리탕은 이미 가족과의 추억을 담고 있었다.


 사먹는 닭도리탕도 좋은 소울 푸드다. 소주 한잔과 곁들이기에 매우 좋은 안주다. 매콤한 국물로 소주의 쓴 맛을 덮을 때 우리는 세상의 쓴맛을 잊는다. 힘들었던 하루를 잠시 뒤로 한다. 식탁 가운데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닭도리탕을 두고 여러 이야기들이 오간다. 치킨이나 치즈 닭갈비의 애매한 담백함으로는 인생의 쓴 맛을 달래주기가 어렵다. 고단한 삶을 이야기할 때에는 역시 닭도리탕의 알싸하고 매콤한 맛이 제격이다. 음식은 정말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말이 맞다.


마늘 듬뿍 올라간 충무로의 유명한 닭도리탕 맛집


 닭도리탕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다. 우리 엄마가 끓인 닭도리탕이 제일 맛있다. 보통보다는 국물이 살짝 많고, 좀 더 매콤한 것이 특징이다. 방금 퍼내어 찰기로 가득한 흰밥에 국물을 적셔서 비벼 먹으면 참 일품이다. 가끔 밖에서 닭도리탕을 먹을 때면 '그 닭도리탕'이 생각난다. 지금은 먹을 수 없기에 더욱 그립다. 만년 2위 닭도리탕, 나에게는 만년 1위이다. 특히 겨울이면 더 먹고 싶어진다. 닭도리탕 좋아하는 사람들 어디 없을까? 최근에 닭도리탕과 곱창전골이 합쳐진 '곱도리탕'이 유행이라고 한다. 닭도리탕도 시대에 맞게 적당한 타협을 이루어냈다. 이번주에 친구한테 곱도리탕 먹으러 가자고 해볼까. 집에서 먹는 라면도 이젠 질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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