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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sh May 15. 2020

아삭아삭, 무생채

 냉장고를 여는 일은 짜릿하다. 냉장고는 미리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 냉장고를 열기 전까지 냉장고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도통 알 수 없다. 기대감 반, 두려움 반이 교차하는 감정으로 냉장고 앞에 선 당신. 방금 일어나서 몽롱한 표정으로, 왼손으로는 정수리를 벅벅 긁으며, 오른손으로 힘차게 냉장고 문을 여는 그 순간, 그 안에 무언가 맛있는 것이 존재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어제 먹다 남은 갈비찜이 남아있기를 바라지만....


 어지럽게 쌓여있는 플라스틱 반찬통만 가득하다. 저건 깍두기. 저건 배추김치. 저건 음...뭐지? 색깔이 요상한데 열어보기 무서우니까 패스. 저건 일주일 넘게 먹은 멸치볶음. 아, 우리 냉장고는 김치 박물관이구나. 갈비찜은 아침에 가족들이 다 먹어버린 건가. 나는 뭐 먹지? 냉장고 안 오른쪽 맨 위 구석을 살펴본다. 분명 계란이 있어야 할 자리다. 그러나 계란마저도 없다. <백종원의 요리비책>에서 계란 하나면 근사한 달걀볶음밥 먹을 수 있다던데. 그것마저도 불가능. 큰일이다. 냉장고 비상사태 발령이다.


 냉장고 앞에서 당황한 기억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목을 삐죽 내밀고 이리저리 살피지만 여기도 김치, 저기도 김치밖에 없을 때 참 곤란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비장의 카드가 있다. '이 반찬' 하나면 나는 행복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따끈한 밥을 따로 놓고, 접시에 '이 반찬'을 가득 담고 참기름 한 바퀴. 고춧가루 가득 머금고 있어 주황색 빛깔을 자랑하는 '이 반찬'은 다름아닌 무생채다.


출처 : 유튜브 채널 'Seonkyoung Longest'


 매끈한 주황빛 비주얼. 씹으면 '아삭!'하며 매콤한 맛과 새콤한 맛이 뒤죽박죽 섞이면서 멀리 떠난 입맛도 돌아오게 만드는, 마성의 반찬 무생채. 따끈한 밥은 무생채의 소울메이트다. 따끈한 밥 한 숟갈, 짭조름한 무생채 한 숟갈. 다른 반찬이 필요없다. 밥-무생채-밥-무생채.. 뫼비우스의 띄 같은 식사를 경험하게 된다. 누군가가 아가모토의 눈을 계속 돌리고 있는 걸까. 정신없이 밥과 무생채를 번갈아 먹다 보면 어느새 기분좋은 한끼 식사를 끝내고야 만다. '잘 먹었습니다!' 정말로 잘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말로 풀어쓰기 보다는 가만히 누워서 무생채에 밥 비벼먹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무생채는 밥 비벼먹을 때 가장 맛있다. 무생채 비빔밥. 다른 양념, 다 필요없다. 양푼에 무생채와 밥을 담고, 무생채 국물을 살짝 붓고 사정없이 비비면 된다. 마지막에 참기름 한 바퀴 둘러서 마무리. 식탁으로 그릇을 옮기는 동안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아 참! 집에 계란이 있다면 더욱 좋다. 바싹 익힌 계란 후라이 하나만 넣어주어도 한층 더 풍부한 무생채 비빔밥을 즐길 수 있다. 반숙 후라이는 No. 덜 익은 노른자는 자칫하면 무생채의 맛을 애매하게 만들어버릴수도 있다. 완숙 계란 후라이, 밥, 무생채, 참기름. 여기까지가 딱 적당하다. 욕심을 내서 더 많은 재료를 넣었다가는 무생채 비빔밥이 아닌 '그냥 비빔밥'이 되어버린다. 무생채의 자존심을 지켜주자. 무생채는 무생채 그대로 맛있다.


출처 : 유튜브 채널 '시골언니의유튜브'


 우리 집은 무생채를 자주 담그곤 했다. 무생채를 담그는 날은 행복하다. 갓 담군 '겉절이 무생채'를 맛볼 수 있으니 말이다. 무의 알싸함이 아직 빠져나가지 않은 상태의 그 희귀한 맛. 무생채를 담그는 날이면 때떄로 보쌈고기를 끓인다. 겉절이 무생채와 뽀얀 보쌈고기의 합도 참 좋다. 커다란 김치통에 무생채를 잔뜩 옮겨담는 것을 보면, '이걸 언제 다 먹지?' 하지만 은근히 빨리 먹는다. 나만큼 우리 가족들도 무생채를 좋아한다. 라면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라면과 무생채를 같이 먹는 것을 특히 즐긴다. 냉장고 구석에 숨어있는 깍두기가 질투하려나. 무생채를 한번 담그면 한동안은 깍두기와 배추김치는 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질리지 않는 게 바로 무생채다.


 아쉽게도 최근에 무생채를 다 먹었다. 당분간 무생채는 우리 집에서 보지 못할 것 같다. 이럴 때 식당에서 무생채를 보면 반갑다. 식당에서 무생채가 반찬으로 나오면 두 번 이상은 리필해서 먹는다. 냉면에 올려지는 무처럼 새콤함에 중점을 둔 무생채도 꽤나 맛있다. 하지만 무생채는 역시 집에서 먹어야 맛있는 것 같다. 잠옷 차림으로 대충 밥을 때려넣고 무생채랑 비벼서 한 숟갈 크게 떠먹는, 격식없는 음식. 무생채가 있으면 냉장고 문 여는 일이 두렵지 않다. 딱히 특별한 게 없다면, 무생채랑 밥 비벼먹으면 되니까. 오늘은 특히 더 땡긴다. 지금 우리 집에는 무생채가 없다. 아무래도 내일 냉장고 앞에서 조금 긴장해야 될 것 같다. 무생채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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