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소설 리뷰,
관계의 공백은 슬픔을 낳는다. 공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절이나 부재와는 다른 종류의 슬픔이다. 죽음이 관계의 단절이라면 공백은 기약 없는 멀어짐이다. 물리적으로는 만날 수야 있지만, 특정한 상황이 두 사람의 멀어짐을 강제할 때 생기는 아이러니가 바로 공백이다. 이산가족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빈터. 공백은 슬픔과 그리움이 교차한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은 그러한 공백을 소재로 쓴다. 단편 <쇼코의 미소>,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신짜오, 신짜오> 그리고 <그 여름>까지, 소설 속 두 주인공은 가까움과 멀어짐을 반복한다. 최근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단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도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희원은 은행을 관두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온다. 한 수업에서 생리로 인해 곤란에 빠진 희원을 강사가 도와주면서 둘의 인연은 시작된다. 희원은 ‘30대 비정규직 여성’인 그 강사에게 무의식적으로 이끌린다. “나는 그녀가 나를 어린 학생들을 보는 것과는 다르게 바라봐주기를 바랬다” 희원은 서점에서 강사의 에세이를 발견하고, 그 에세이에 적힌 강사의 추억과 희원 자신의 공간이 겹치는 것을 발견하고는 강한 흥미를 느낀다. 그 공간은 용산이다.
용산, 시간이 흘렀지만 그 이름은 여전히 무겁다. 강사와 희원은 부끄러움을 공유한다. ‘그 일’이 있었을 때 강사는 논문을 작성하고 있었던 것에, 희원은 술을 마시고 자고 있었던 것에 대해 부끄러워한다. ‘그 일’은 용산 참사를 말한다. 소설의 ‘공백’은 희원과 강사의 관계를 넘어서 독자와 ‘용산 참사’ 사이를 가로지른다. 희원이 용산에 대한 에세이를 발표했을 때 취했던 그 모호한 감상적 태도는, 동시에 우리가 용산 참사를 대하는 일상에서의 태도를 보여준다. 하나의 사건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극화된 우리의 ‘만남’은 항상 유보된다. 옳고 그름의 논쟁만이 반복되고, 희생자들의 이야기나 고통받은 사람들의 끝나지 않는 현실과 같은 것들은 외면받게 된다. ‘사건’과 우리 사이의 진실된 관계는 기약 없이 멀어질 뿐이다. 소설 속에서 토론 수업 중에 희원의 발언에 대해 한 학생은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라고 말을 끊으며 논리적 비판을 한다. 그에 대해 강사는 ‘학생의 말이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잘못됐다’라며 그 학생에게 사과하라고 한다.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게 여김으로써 용산 참사는 일어났고, 우리는 아직도 그들의 속깊은 이야기보다는 사건의 옳고 그름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강사의 말은 우회적인 꾸짖음이다.
시간이 흘러 희원은 대학교 강사가 되었고, 희원은 그 이후로 만나지 못했던 그 강사와의 추억들을 떠올린다. 그녀가 여자 강사로서 겪어야 했던 일들에 대해 깊이 다가가보기도 한다. 최은영의 섬세한 문체와 함께 희원과 강사 사이의 ‘공백’은 감수성을 자극한다. 이 소설이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용산 참사’라는 사건이 독자와 소설 사이에서 미묘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삶에 공감할 수 있다. 우리가 ‘용산 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때, 공백에 자리잡고 있는 슬픔은 서서히 치유될지도 모른다. 결국 최은영의 공백의 세계는 감수성의 차원을 넘어, 사회의 아픔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잊지 않는 것, 그것은 매우 중요하다. 문학의 역할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