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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sh Nov 23. 2020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소설 리뷰,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우리는 왜 우울할까. 세상은 끊임없이 경쟁을 요구한다. 그 보답으로 미래에는 가치 있는 인생,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달콤한 환상을 속삭이며 말이다. 아쉽게도 그러한 미래는 계속해서 뒤로 미뤄질 뿐이다. 작은 일상 하나하나가 소중하다면서 은근히 소확행의 삶을 살라고 강요하기도 한다. 괜히 나대지 말고 작은 것에나 행복을 느끼라는 식이다. 결국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계속해서 방황하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울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원래 인생은 본디 무의미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우리의 삶은 영원히 반복되는 굴레 안에 갇혀 있고, 어느 날 했던 일이 또 다시 반복될 것이며, 이 반복이 무한하다면 인생이란 결국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삶은 허무해진다. 동일한 삶의 반복.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 주변 사람들 모두 빠짐없이 반복된다는 말은 정말로 인생의 무게를 끝도 없이 가볍게 만들어내고야 만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프라하의 봄


 1968년 프랑스, 미국, 독일, 일본 등에서 전세계적인 민중 혁명(68 혁명)의 기운이 들끓고 있었을 때, 동시에 체코에서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당이 권력을 쥐고 있었으나 지식인들과 체코 국민들이 민주화-자유화를 계속해서 강력하게 요구하자 그 결과로 개혁파 둡체크가 정권을 잡게 된다. 둡체크는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보장, 견고한 의회제도의 보장 등 민주적 제도를 점진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불만이 커진 소련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체코슬로바키아로 향하게 된다.

 민주화의 열망을 부르짖은 프라하의 봄은 소련의 무자비한 탱크 앞에서 처참히 무너졌다. 소련의 탱크는 왜 체코슬로바키아로 향해야 했을까. 이념의 차이는 왜 소련 탱크의 화약을 뜨겁게 만들어야 했을까. 6번의 우연이 테레사와 토마시를 만나게 했지만, 테레사는 망명한 스위스에서 다시 프라하로 떠나게 된다. 토마시는 선택해야 했다.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 소련 탱크가 체코 국민들의 피를 흘리게 했던 것이 '그래야만 했다'면, 토마시 또한 스스로에게 똑같은 말을 외치며 테레자에게 향했던 것이다.


 인생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삶의 의미 또한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인생은 끝없이 가볍기만 하다. 의미가 없어진 인생에서 인간은 무엇을 사랑해야 할까. 토마시에게 일어난 6번의 우연이 없었다면 토마시는 테레사를 만날 수 없었다. 그 우연은 영원히 반복된다. 영원한 회귀는 인간에게 운명이자 필연이다. 토마시는 이 운명을 긍정했다. 안정적인 망명 생활을 등지고 프라하로 떠나서 테레자를 만나는 그 순간 우연은 필연으로 변하게 된다.



니체의 영원회귀와 삶의 긍정


 토마시의 선택은 니체가 영원회귀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운명에의 사랑' (Amor Fati)을 암시하게 된다. 삶의 반복에서 인간은 허무함을 깨닫는다. 종교적 내세관은 힘을 잃고 무의미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신은 죽었다. 인간은 선택에 기로에 서게 되는데, 첫 번째로는 극단적인 허무함에 빠져 이것은 결국 죽음과 가까워지는 경우가 존재한다. 그러나 두 번째, 즉 인간에게 주어진 영원회귀의 운명 그 자체를 사랑할 경우, 자신에게 주어진 우연의 연속을 기쁨으로 맞이할 경우, 인간은 삶을 긍정하고 결코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는 '힘에의 의지'를 추구하는 초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소설 중반부에서는 토마시에 의해 오이디푸스 신화가 언급된다. 신탁을 받은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할 것이라는 끔찍한 운명을 선사받고, 오이디푸스는 이 운명을 철저히 거부하지만 결국 스스로 자기 자신을 운명 속에 몰아넣는다. 운명에는 도덕적인 가치나 특정한 방향성을 지닌 의미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헤겔이 말하는 위대한 이성이 이끄는 역사의 진보에 대해 영원회귀는 코웃음을 치고 무시해버린다. 또한 운명은 절대로 고정된 것이 아니며 특정한 타자에 의해 주어진 것도 아니다. 우연의 집합인 운명은 스스로의 행위에 따라 변화를 거듭한다.


막스 데미안과 니체, 그리고 지금의 우리는


 요즘 TV 프로그램에서 소개되어 상당히 핫한 소설 <데미안>. 주인공 싱클레어에게 막스 데미안은 기존의 도덕적인 가치 체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라는 말은 곧 '날아야 한다'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기 위해서 왜곡된 가치로 뒤덮인 세상을 극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데미안은 전쟁이란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헤쳐나가야 한다고 싱클레어에게 이야기한다.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그 순간 그 어느 의미 체계도 긍정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긍정하게 된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힘에의 의지를 엿볼 수 있게 된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던 우리들에게 쿤데라와 니체는 삶의 무의미함을 안겨준다. 대신에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긍정할 수 있는 또 다른 삶의 실마리의 여지를 남겨둔 채 그들 또한 운명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고단한 삶 속에서 우리는 의미를 갈구하는 대신에, 우리의 실존을 사랑하며 기존의 가치를 뛰어넘어 오직 자신만을 의지한다면 우울함 대신 기쁨과 호기심으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작가는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위로와 극복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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