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지프 신화 〕
책 리뷰,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나약함을 점점 깨닫게 되는 과정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얀 스케치북 종이에 삐뚤삐뚤 각자의 꿈을 적었던 어린 시절.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그 꿈과 점점 멀어져야만 했다. 마치 특별한 존재인 줄 알았던 자신이 사실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임을 깨닫게 될 때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수능 시험으로 첫 평가를 받고, 취업 준비를 위해 남들과 똑같은 양복을 입고 똑같은 면접을 치루며, 어느샌가 평범한 직장인이 된 자신과 마주할 때, 어릴 때보다 몸은 커졌지만 마음은 한없이 작아지고 있었다. 희망이 사라진 세계, 그 순간 삶의 허무함은 그에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무섭게 찾아오고야 만다.
카뮈는 이 모순을 이해했다. 삶의 부조리는, 인간의 욕망과 비합리적인 현실 사이의 마주침에서 발생한다고, 카뮈는 말한다. 우리가 의도하고 기대했던 세계와 실제로 닥친 현실과의 불균형이 곧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현실의 부조리함을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의미로 넘치는 삶이란 없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무의미만이 가득한 세계에서 불안한 인간은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카뮈는 이 문제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깊은 관심을 가졌고, 또한 회피하지 않았다.
알베르 카뮈
소설 <이방인>에서 카뮈는 뫼르소라는 인물을 통해 삶의 무의미와 부조리를 고발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방인>의 첫 문장이다. 지금껏 인간에게 가장 의미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가족' 조차도, 언제 죽었는지 헷갈릴 정도로 한없이 무의미한 것으로 추락시켰다. 카뮈는 소설로서는 <이방인>, 극으로서는 <카리귤라>와 <오해>, 그리고 <시지프의 신화>라는 사상서로 자신의 철학을 담아냈다고 언급했다. 따라서 <시지프의 신화>를 통해 우리는 좀 더 직접적으로 카뮈의 사상에 다가갈 수 있다.
먼저 카뮈는 인간의 자살에 주목한다. 부조리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 인간은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빠져 결국 삶을 비관한 채 자살을 선택한다.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 삶에서의 단 하나의 진리는 '죽음' 뿐이다. 죽음은 곧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숙명이자 현실이다. 종교는 죽음 이후의 삶을 강조하지만 부조리한 인간에게 종교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세스토프나 키르케고르는 부조리를 발견했지만 종교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다. 카뮈는 실존주의와 현상학 철학자들의 잘못된 결론, 즉 신으로 귀결되는 결론 혹은 부조리 자체를 신격화하는 것을 책 속에서 꼬집는다.
사물의 깊은 의미를 믿지 않는 것, 이것이 부조리한 인간의 속성이다. <시지프 신화>
떨어지는 돌을 끊임없이 굴리는 시지프
다시 질문해보자. 우리가 삶의 부조리함, 삶의 끝없는 무의미함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카뮈는 사물의 깊은 의미를 믿지 않는 부조리한 인간의 운명을 시지프 신화를 빗대어 이야기한다. 시지프는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끊임없이 산 꼭대기까지 돌을 굴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시지프가 열심히 산 꼭대기까지 돌을 굴리면 돌은 저절로 맨 아래로 떨어진다. 시지프는 떨어진 돌을 다시 굴려서 꼭대기까지 올려야 한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돌이 떨어지는 순간, 시지프는 부조리를 목격한다. 카뮈는 시지프의 삶이 곧 우리 인간의 삶과 닮아있다고 이야기한다.
시지프가 행복하다면, 그것은 그가 운명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돌을 굴려야 하는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매 순간마다 자신의 노력을 다하는 그는 부조리한 인간이자 동시에 자유로운 인간이다. 신에 의한 구원이나 막연한 희망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믿는 시지프는 행복할 수 있다. 우리 또한 별로 다르지 않은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살아간다. 학생에게는 학교 수업 시간이, 직장인에게는 노동 시간이 시지프의 돌처럼 매일 다가온다. 막연한 희망은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인간이 막연한 희망에서 벗어나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운명에 적극적으로 반항하고 맞서기로 결심할 때, 그는 행복할 수 있다. 운명을 부정할 경우 부조리한 인간은 자살한다. 운명을 긍정하는 부조리한 인간은 마치 시지프처럼 자신만의 돌을 굴리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앞을 헤쳐나간다. 니체의 운명에의 사랑(Amor Fati)은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카뮈의 대답, 그리고 우리의 삶
암울한 대답일지도 모른다. 카뮈의 대답은 부조리한 현실 그 자체를 뒤엎을 수 있는 묘책이 아니다. 그러나 부조리한 현실, 그리고 삶의 무의미성을 목격하는 바로 그 지점이 중요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의미란 없다. 우리의 삶은 일정한 목적을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다. 한없이 무의미한 것, 따라서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주어진 의미가 없는 세상에서 의미를 만들어나가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결국 우리 자신이다. 돌을 굴려야 하는 시지프의 삶에서 의미를 창조해내는 것은 바로 시지프 본인인 것처럼 말이다. 의존하지 않는 인간. 운명을 사랑하는 인간. 여기에서 카뮈는 무의미를 극복하는 힘을 발견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질문에 답을 해보자. 어제와 오늘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분명 내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운명은 우리의 희망에는 무관심하다. 하지만 오직 나 스스로 삶을 설계하고, 다른 누구에도 의존하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창조해내고자 할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내가 곧 주인인 삶, 신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헤쳐나가는 삶, 이것이 곧 부조리한 인간을 위한 카뮈의 대답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이것은 세상이 답해주지 않는다. 스스로 삶에 의미를 부여할 때, 그에게 인생은 아마도 살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