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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sh Jan 13. 2021

‘그냥’을 ‘아름다움’으로 치환하는 사람

〔 시와 산책 〕


책 리뷰,

한정원 산문집 『시와 산책』




 아쉬움이 몰아치는 시간이 있다. 잠에 들어야 하는 늦은 밤이면 나는 잠에 들기를 망설인다. ‘오늘 하루는 너무 평범했던 것이 아닐까’, 혹은 ‘이렇게 하루를 끝내도 괜찮을까’ 하는 마음들이 나를 붙잡는다. 내일은 오늘과는 다를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보지만 이내 아쉬움이 남는다. 낮에는 일과를 하고, 저녁에는 넷플릭스에서 좋아하는 미드를 보는 그런 일상을 나는 왜 아쉬워했을까. 아마 특별한 순간이 부재해서 그랬을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서 기억에 남길 수 있는 장면이 하나쯤은 있기를 바랬다. 영화로 비유한다면 <쇼생크 탈출>에서 탈옥 장면이 통째로 잘려나간 식으로 나는 내 일상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런 나와는 다른 마음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이 있다. 작고 평범한 것들에도 깊이 몰입하고 관찰하는 사람. 그냥 지나치지 않고 애써 그 자리에 머무르는 사람. 무언가와 마주하며 바라보고 골똘히 생각하기를 사랑하는 사람. 나는 특별한 감정은 특별한 순간에서 오는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인지 평범한 일상에서는 감정의 문을 닫아버리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일상을 관찰하는 법을 알려준 사람이 있다. ‘그냥’ 보내는 하루를 아름답고, 안온하고, 따뜻하고, 마음 쓰이고, 슬프다는 식의 다양한 모양새로 쓸 수 있었던 사람. 책 <시와 산책>에서 나는 한정원 작가를 만났다.



지긋이 관찰하는 산책


 산책을 종종 즐긴다. 발 딛는 대로 걷다 보면 복잡한 생각이 조금씩 덜어지는 기분이 들어서다. <시와 산책>에서 저자인 한정원 작가는 나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산책을 한다. 그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지긋이 관찰한다. 호수를 걷다가 만난 노인을 보며 늙음이란 무엇일까 고민하고, 흐린 날씨에 걸으며 구름의 다정함을 생각한다. 날이 추워지는 11월에는 '11'이란 숫자를 보고선 앙상한 가지만이 남은 나무와 닮았다며 계절과 나무에 대한 사유를 이어간다. 이 모든 생각의 과정에는 '시'가 있다. 저자는 시를 인용하고 지금 바라보는 풍경과 포개어 관찰한다. 이 책이 걷기를 말하는 무수한 에세이들에 비해 특별한 점을 묻는다면, 시에 대한 저자의 풋풋한 애정이 모든 문장에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라고 답해본다.



나는 흐린 날을 다정히 맞는 편이다. 침침한 빛, 자욱한 사물들, 묵직하게 흩어지는 향. 흐린 날에는 모든 존재가 자신을 잠잠히 드러낸다. 내 안의 언어와 비언어들조차 소란스럽지 않다. 그 세계가 몹시 안온하고 충만해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을 정도이다.

<시와 산책>, 한정원 (p136)


 '연민'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떠오른다. 저자는 동네를 걷다가 과일 트럭 아저씨, 단층집 문 앞에서 항상 담배를 피우던 담배 아저씨와 우연히 길고양이 때문에 말을 섞게 된다. 항상 넉넉하게 과일을 챙겨주던 과일 트럭 아저씨와, 고양이 밥을 주며 인사를 나누던 담배 아저씨.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동네를 떠나야만 했던 때에 저자는 아저씨들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의 아낌없는 배려는 연민이 아니었다고.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한 연민이 아니라, 서로의 외로움을 채워주고 있었던 따뜻한 마음이었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남을 돕겠다고 나섰던 일들이, 사실은 우월함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남을 보살피는 마음은 똑같은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것은 아닐까. 저자의 산책에서 따라나온 생각의 흐름이 이제는 나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다.


 저자는 바다와 강에서 느꼈던 서로 다른 감정을 기록하기도 한다.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강의 물결에서는 저자는 으스스함을 느낀다. 항상 자신에게서 멀리 달아나기만 하는 강의 물결을 보고 서운하다고도 말한다. 반면 바다는 자신에게서 도망가다가도 이내 다시 발목을 잡는, 다정한 친구 같다는 표현을 한다. 밀물과 썰물을 반복하는 바다를 두고 말하는 저자의 표현이 새로웠다. 바다에서 파도가 치고, 강이 한 방향으로 졸졸 흐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 당연한 일상에서도 저자는 추억을 떠올리고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저자에게 '그냥' 벌어지는 하루는 없었다. '그냥'을 '아름다움'으로 치환해서 매일 서로 다른 모양의 아름다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특별한 순간이 아니었다. 사소한 일상이라도 오롯이 관찰하는 법을 나는 몰랐을 뿐이었다.



매일 산책하는 사람들은 자연이 돌연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2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미 봄은 존재했다. 흙이 부풀어 올랐고, 나무줄기의 색이 바뀌었다. (...) 봄은 단서들을 한껏 뿌리고 다녔건만, 도시의 건물 안에서는 감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시와 산책>, 한정원 (p147)



내일도 맞이하게 될 평범한 하루


 자기 전 아쉬움이 가득했던 것은 오늘에 대한 섭섭함과 내일에 대한 불안이 교차했던 탓이다. 오늘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과, 내일도 마찬가지로 오늘처럼 무미건조한 하루를 보내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어쩌면 남들은 빨리 달려가고 있는데 나만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조급함의 마음.


 <시와 산책>에서 일러준 관찰의 지혜가 불안했던 나를 다독여주었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은 지극히 평범할지 몰라도, 나의 시선과 나의 태도를 조금만 변화하면 특별함은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고. 중요한 것은 발견하고 관찰하고 아름다움을 품으려는 나의 마음이라고. 걷기는 그런 발견을 돕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고. 부쩍 추워진 날씨에 요즘은 더욱 웅크려진다. 걷기를 주저할 수 밖에 없는 영하의 날씨지만, 패딩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놓고 목도리를 단단히 여매어 집 주위를 가볍게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무심하게 걷다가 떠오르는 감정들이 있다면, 꼬리를 물고 물어 생각을 이어나가보자. 평범한 일상은 그렇게 특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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