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장수집

나를 나답게 만드는 단어들

2월의 문장수집

by minish
#01.
언어는 그 민족의 얼을 담고 있다. 소수민족의 언어에는 ‘점령’이라는 단어가 없다.
- <MMCA 올해의 작가상 2024> 권하윤 작가 구상 노트 중


어떤 낱말들은 때때로 음식처럼 느껴진다. 희망, 일상, 사유, 관용,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의 일본어 ‘코모레비(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 같은 단어들을 만나면 마치 신선한 샐러드를 먹는 기분이다. 그 반대로 퇴근하고 지친 몸으로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 쇼츠의 0.5초 간격으로 바뀌는 정신없는 자막들은, 아주 달고 짠 가공 식품처럼 자극적이면서 피로감을 준다. 나쁜 단어들이 종일 내 기분을 움켜쥐면 쉽게 지친다. 누군가를 혐오하기 위해 만든 단어들이 특히 그렇다. 그 단어들은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태어난 것이다. 가리키는 대상도, 발화하는 스스로도 지치게 만들도록.


애써 좋은 단어들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건 스스로의 몫이다. 전시에서 만났던 “소수민족의 언어에는 ‘점령’이라는 단어가 없다”라는 문장처럼, 부정적인 단어의 존재가 부정적인 생각을 낳는다. 나에게 용기를 준 문장을 메모하고, 기분 좋은 리듬감을 주는 단어는 일부러 대화에서 사용해보고, 한국 작가들의 소설 책을 좀 더 찾아 읽어보는 식의 일들부터 해 보려고 한다. 어릴 때 질리도록 들었던 ‘그릇을 키우자’ 대신 올 해’는 그릇에 좋은 재료를 담자’라는 말이 나에게 더 와닿는다. 정신없는 30대 초반에서 중심을 잃지 않도록, 우선 내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언어들부터 경계하고 잘 선택하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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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여기 하늘을 소유하는 셈이죠. 정말 독특해요.
- <셀링 맨해튼> 넷플리스 시리즈 중


요새 재밌게 보는 프로그램으로 넷플릭스의 ‘셀링 OOO’ 시리즈가 있다. LA, 맨해튼 등 다양한 지역에서 수천만 달러 규모의 고급 부동산을 거래하는 중개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사실 시리즈의 메인 주제는 ‘가십’이다. 그래서 직원들이 서로 누구랑 연애하고 누구를 뒷담하고 하는 식의 자극적인 대화들이 많이 나온다. 이런 인물들의 자극적인 관계성도 흥미롭지만 나는 이 시리즈를 볼때 중개인들의 ‘일잘러’ 모먼트가 나올 때 특히 재미를 느낀다. 최근 신작으로 나온 ‘셀링 맨해튼’은 다른 시리즈와 대비해서 이런 일잘러 모먼트가 더 많이 나와서 재밌게 보고 있다.


중개인이 고객에게 집을 보여주면서 스피치를 하는데, 인상적인 멘트들이 많다. 예를 들어 뉴욕의 최고층 아파트에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보이는 통창 거실을 소개할 때, ‘여기 하늘을 소유하는 것이죠’ 라고 하면서 ‘당신이 뉴욕의 하늘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뉘앙스를 주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여기는 몇 층이고, 별로 없는 기회이고, 가격 대비 저렴하고, 어떤 건물이 보인다라는 사실을 나열하는 대신 ‘뉴욕 하늘을 소유한다’라는 카피 한 문장이 더 기억에 남는 말이다. 그 외에도 북향 집에 대해서 ‘원래 예술가들이 북향을 좋아한다’ 등, 세일즈 스피치를 하는 장면들이 마케터인 나에게는 흥미롭다.


뉴욕은 낭만의 도시이고, 중개인들은 본인들의 타겟이 ‘낭만을 구입하는’ 부유층 사람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좋은 카피나 스피치는 장면을 선물해준다. 타겟 고객이 특정 장면을 상상하도록 돕는 일이, 마케터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03.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의 재능은 재능 자체가 아니라 즐거움에서 비롯한 부지런함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비록 뛰어난 실력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그가 존경하는 음악인의 양대 산맥인 바흐와 듀크 엘링턴의 음악을 다소 불안정할지언정 수줍어하지 않고 연주했다. 그리고 연주하는 내내 음악의 아름다움을 진심으로 찬양하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예술가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나의 생각은 분명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중


자기 의심이 심해질 때가 종종 있다. 내가 하는 일, 내가 만드는 작업물들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지, 어쩌면 거기에 아무런 반응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지 등, 과정보단 결과물에 집착하게 될 때 특히 그랬었다. 돌이켜보면 결과물에 집착하는 일상을 살아갈 때, 그 순간들에 즐거움이 부재했던 것 같다. 디제이 셋을 만드는 일, 마케팅 소구포인트를 잡는 일, 브런치 글을 기획하는 일, 파티를 만드는 일 등등에서. 목표나 성과에만 몰두할 때 어떤 일이든 공허함이 커지게 될 뿐이었다.


프로듀서이자 세상에 영감을 주는 작가인 릭 루빈은 일상에서 예술가가 되는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음악처럼 보통 세상에서 얘기하는 ‘예술’에 범주에 들어가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일상 모든 영역에서 예술가처럼 관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세상과 연결됨을 인식하고, 나만의 특별한 관점을 고민하고, 우연히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사랑하는 일 등. 릭 루빈의 책을 읽고 난 후 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에서 만난 문장을 통해 예술가라는 개념에 대한 나의 이해가 더욱 선명해졌다. 결과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 나만의 관점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는 과정을 즐기는 것. 매일의 순간순간을 즐길 때 그 일상이 예술이 된다. 새로운 창조는 이런 태도로부터 출발하는 것일까. 순간순간 다가오는 즐거움들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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