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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sh Jul 05. 2022

문장 수집의 쓸모

최근에 방 청소를 했다. 구석에 쌓여서 뭉친 먼지들을 닦았다. 깊은 구석까지 머리를 들이밀고 힘겹게 먼지를 닦은 곳은 다음과 같다. 겨울 코트가 가리고 있는 왼쪽 행거 바닥, 컴퓨터 본체 아래, 책장 제일 윗칸에 있는 두꺼운 책들의 뒷면 등. 그곳에 먼지가 늘 쌓여가는 걸 알면서도 애써 외면했지만 본격적인 청소를 다짐했기 때문에 부지런을 떨었다. 가구의 위치도 살짝 옮겼고, 사놓고 잘 읽지 못하던 책들도 버렸다.


 청소가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다. 버려야 할 물건들을 방 바닥 한 가운데에 모았다. 방금 전까지는 쓰레기가 아닌 존재들이 쓰레기로 취급되는 순간에 나는 또 다른 물건을 쓰레기로 만들 필요가 있을지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 순간 행거가 눈에 띄었고, 나는 행거에서 안 입는 흰 티를 빼려고 손을 뻗었다. 흰 티를 당기는 순간, 쾅! 하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나는 뒤로 자빠졌다. '쾅'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헹거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행거의 뼈대가 나의 옷 충동구매를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만 쓰러져버린 것이다. 그렇게 나는 아까 모아두었던 방 바닥 쓰레기더미와 행거의 수많은 옷들 사이에 마치 샌드위치처럼 낑기게 되었다. 


 다행히 다친 몸은 없었다. 미친 상황만 있었다. 한숨을 크게 푹 쉬고 쏟아지는 무력감에 굴복하려던 찰나, 나는 문장 하나를 떠올렸다. 나와 가까웠던 사람이 예전에 건네준 말이다.


삶이 내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 

- 은희경 (새의 선물)


 그 사람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이 문장만 떠올리면 용기를 얻게 된다고 말했었다. 몹시 안 좋은 일이 찾아와도 삶이 내게 건네야만 하는 말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 라고 나도 속으로 생각하면서 은희경 작가의 이 문장을 오랫동안 마음속에 보관하고 있었다. 이 문장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은 아마 외롭고 우울한 감정을 느낄 때가 아닐까, 하고 감성적인 태도로 이 문장을 대하고 있었는데 참 어이없는 순간에 저 문장이 출동한 것이다. 헛웃음이 났지만 동시에 은근한 위로를 받았다. '내가 쓰레기더미에 낑긴 상태에서 옷을 헤집고 일어나 행거를 또 다시 걸어야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가 있을거야', '얼른 치워버리자'는 식으로 허탈한 마음을 용기로 바꿔보았다. 감정 소방수처럼 비상 상황을 수습해준 은희경 작가의 문장에 감사했다. 낑긴 몸을 기울여 일어나 행거를 다시 걸고 쓰레기도 다 치웠다.


부디 오래오래 건강해주세요 행거님


 문장 수집은 오래된 습관이다. 암기력에 약한 나는 영감이 될 만한 문장을 발견하면 나중에 또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사진을 찍거나 스크린샷을 해서 스마트폰 앨범에 저장하고 있다. 필사도 종종 한다. 특히 소설과 같은 문학에서 발견한 문장은 직접 손으로 쓰거나 말로 뱉을 때의 아름다움도 있기 때문에 가끔 필사로 문장을 옮긴다.


 사실 이런 습관을 정착하는 데 방송 프로그램 <알쓸신잡>이 큰 영향을 줬다. <알쓸신잡>에서 출연자들이 하는 대화는 참 매력적인데, 한 출연자가 특정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면 다른 출연자들이 그 인물이 직접 말한 명언이나 그 인물에 대해 다른 사람이 쓴 문장들을 마구마구 쏟아낸다. 그 과정에서 대화가 깊고 풍부해진다. <알쓸신잡>을 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저기 나온 사람들처럼 친구랑 대화하다가 멋있게 명언을 던지고 싶은 다소 어이없는 생각을 품었다. 실제로는 친구들과 술 먹을 때 가끔 시도한다. '아, 이 타이밍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했던 그 문장 한번 던져볼까?' 하지만 이런 명언을 뱉는 스스로의 모습을 민망해하는 내향적인 성격 탓에 그냥 지나가버리고 만다. <알쓸신잡>식 대화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마치 이런 대화...?


 우스운 이야기를 잠시 했지만 영감 이야기로 돌아가본다. 그런 문장들이 있다. 이제까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잠시 돌아보게 하는 문장들. 예를 들어 엄지혜 작가가 '태도의 말들'에 적은 아래와 같은 문장처럼.


좋은 태도를 가진 사람은 타인에게 영감을 준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덩달아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잘 살아보고 싶은 의지가 생긴다.
드러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빛이 나는 사람들이 있다.
순간 반짝이고 사라지는 빛이 아닌 뭉근하고 꾸준한 빛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 
물론 그런 빛은 볼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 엄지혜 (태도의 말들)


 이 문장을 만나면서 나의 태도를 반성했다. 최근에 여러 기회로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의 약점을 감추고 멋진 모습만 강조하고 싶어했다. 동의하지 않는 것에도 동의하는 표현을 했고 좋아하지 않는 것에 좋다고 반응했다. 그렇게 억지로 좋은 모습만 드러내려 하는 나에게서 비추어지는 건 돌아보면 어색함 뿐이었다. 알아봐주길 바라는 마음을 거두기로 했다. 순간 빛을 억지로 내는 사람이 아닌 뭉근하고 꾸준한 나만의 솔직한 빛깔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고민이 담긴 문장이 좋다. 그 문장에 마침표를 찍기까지, 생각을 확신으로 옮길 때까지 마주했던 수많은 고민의 과정이 느껴지는 문장들을 만나면 행복하다. 그런 문장들은 담담하고 힘이 있다. 소설 속 나와 닮은 인물의 대사일지도, 우연히 예능에 출연한 어떤 노동자의 말일수도, 혹은 친구가 무심하게 뱉은 정제되지 않은 대화일수도 있다. 문장으로 그 사람의 생각을 읽다가도 사유의 끝은 나를 향해있다. 타인의 말을 통해 나의 생각을 단단하게 하거나 혹은 다른 방향으로 고치기도 한다. 그 사람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어떻게 다른지 확인하고 마지막에는 그 문장을 내 세계 안으로 들인다. 그렇게 문장 수집은 타인의 생각을 통해 나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작업이 된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는 동호회 프로그램이 있다. 동기들과 문장 수집에 대한 이야기를 가볍게 하다가 어느새 회사 구성원 18명이 참여하는 실제 '문장수집 동호회'가 만들어졌고 나는 동호회장까지 맡아버렸다. 동호회장을 잘 수행할 자신감은 좀 떨어지지만... 다른 사람들이 가져오는 문장은 어떨지 정말 궁금하다! 혼자만의 취미였는데 공유할 수 있는 동료들이 생겨 기분 좋다. 분기별로 동호회 가입과 탈퇴를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과연 다음 분기에 살아남을 수 있을 지. (인스타그램 계정도 만들었는데!) 안절부절한 마음과 기대하는 마음을 동시에 품고 운영을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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