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살기 그림일기] 생활 속 소리에 귀 기울여보기

소리듣기

by 소형

듣는 것


소형


듣는 것을 좋아한다. 가만 들어보면 모든 물체는 실제로 소리를 낸다. 방안에 가구처럼 앉아 미동 없이 숨만 쉬노라면 부산 떨 땐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추운 밤을 지나 높아진 기온에 웅크린 몸을 펴는지 콘크리트 벽에서 탁, 장판이 툭, 방문이 톡. 작은 소리들이 끊어질 듯 끊이지 않는다. 오늘은 불청객 같은 소리가 다른 소리 위에 얹혀있다. 피---하는 가늘고 높은 소리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핸드폰 충전기가 콘센트에 꽂혀 소리를 내고 있다. 다가가 뽑아주니 밤새워 울던 쉰 소리를 그치고 잠든다.

다시 벽에서 탁, 장판이 툭, 방문이 톡.

설거지를 마친 수도꼭지에서 한참을 모인 물 분자들이 이제야 하나의 물방울을 이루어 똑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투둑 소리가 나는 방향을 보자 아이비가 흔들리고 있다. 아이비의 얽혀있던 두 잎이 각자 다른 가지에서 다른 방향으로 성장하다 드디어 풀리는 소리이다. 설거지 끝낸 그릇이 맞춰지는 소리 달그락... 조금이라도 힘이 어긋나 있는 물체들은 오래, 꽤 오래 시간이 지나면 작은 소리를 내며 균형을 찾아간다. 주변의 소리가 단조롭게 느껴질 때 공기를 크게 울리며 크레셴도로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밀려든다. 소름이 돋는다. 피—하는 가느다란 음과 웅~하는 바리톤이 섞여있다. 냉장고가 온도를 낮추느라 내는 소리이다.

집안의 물건들과 그렇게 인사를 하고 의식을 창밖으로 돌린다. 과속 방지턱을 조심히 넘어가는 차 소리, 운동장 아이들 소리, 새소리, 아랫집의 물소리, 정원 손질하는 소리, 무언가 탁탁 치는 소리. 참 신비하다. 눈앞에 보이는 건 움직임이 없는 적막한 풍경이지만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살고 있는 것이 나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 이 시간 모두 분주히 소리를 내며 풍경 안에 살고 있다.

오늘은 좋은 사람을 만나러 나간다. 평소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적막하게 보내는 나는 생각이 별로 없고 걱정도 없어 마음속 풍경 역시 고요하다. 그래서 종종 사람을 만나도 꺼낼 말이 없다. 나만큼 할 말 없는 사람을 만나면 굉장히 어색해진다. 하지만 오늘 같이 말을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의 단단한 언어들이 내 마음속을 휘저어준다. 침전되었던 생각들이 떠올라 나도 할 말이 생긴다. 상대의 생각 나비들을 내 마음 안에 데려오고 나 역시 평소 키우던 생각의 나비들을 날려보낸다.

말을 하는 것도 좋지만 역시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좋다. 사람들은 자기 말을 할 때 표정이 풍부하게 변화하고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아름답다. 개성 있는 목소리로 끊임없이 읽어주는 생각의 다발들은 무겁든 가볍든 모두 재미있다.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면 그 대화의 분량은 어느 정도일까? 책 한 권 분량은 족히 되지 않을까?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책 한 권을 읽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만남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마음속 풍경은 전과 다른 모습으로 조금 낯설어져 있다. 몰랐던 정보들도 폭풍처럼 들어와있다. 장바구니 가득 쇼핑한 듯 차고 넘치는 마음속이다. 말 욕심이 많다 하지만 사실 듣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야말로 아주 탐욕스러운 것이다.

사람을 만나고 들어와 조금 시끄러워진 마음속은 생각들로 분주하다. 생각이 시끄러우니 오전에는 들리던 주변의 소리를 들을 여유가 사라져있다. 조용히 앉아 시끄러운 마음을 정리한다. 독한 언어의 화살촉은 뽑아 말 이면의 마음만 남기고 흥미로운 정보들과 변화된 생각들을 음미한다. 그렇게 생각을 정돈시키면 좀 더 넓어진 마음속 풍경은 고요해지고 다시 들을 준비가 된다. 벽에서 탁, 장판이 툭, 방문이 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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