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혈맥'을 본 후
요즘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를 국립극단에서 진행 중이다.
그중 한 연극 '혈맥'을 명동 예술극장에서 보았다.
혈맥의 배경은 해방 직후인 1947년이다.
공간은 방공호 아래의 동굴과 같은,
사람이 도무지 살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우울한 공간.
그곳에 죽어가는 병자를 부양하는 북한 말씨의 가족과
아들 하나를 둔 홀아비 가족,
딸 하나를 둔 가족이 있다.
평소에 윤광진 교수님이 연출하신 작품을 좋아하기에 기대도 컸고,
다행히도 만족감도 컸다.
극 중 백옥희라는 여자는 당시 여성들 중 성공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자신은 지긋지긋한 방공호라는 쓰레기 더미를 탈출하여,
마담이 되어, 돈을 잘 벌고 신나게 춤을 추며 잘 산다고 말한다.
하지만 본인도 자신의 다가올 미래를 알기 때문일까.
왜인지 모르게 만취한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쓸쓸해 보인다.
해방 직후의 정신없는 사회에서
주인 있는 땅이라고 우기는 관리인과
오래간 그 자리에서, 사람 사는 곳 같지 않은 곳에서 그 자리를 살아온 주민들은 다툰다.
이 모습은 너무나 그 당시의 정리되지 않은 사회 상황을 잘 보여준다.
청년세대가 헬 반도라고 외치지만, 그래도 이때에 비할 바는 못되리라.
'사상가. 무늬만 사상가. 입만 살은 놈.'
원팔의 동생 원칠에게 원팔은 이렇게 욕한다.
왠지 모르게 원칠에게서 나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많이 배울수록 말을 아끼게 되고,
그렇다고 행동을 하는 것도 주저하게 되고.
원칠도 미안한 마음에 돈을 벌겠다고 막상 막노동을 시작하지만,
다리를 다친다.
요즘 세상 참 힘들다. 맞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취직을 앞두고 있는 동기들을 보면
한숨만 쉬게 될 따름이다.
나 역시 학점 관리, 봉사활동, 대외활동 등을 이야기하며 가족에게 소홀하고,
할머니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아니 사실 치매 걸린 할머니가 나에게 돌아가신 외삼촌 이름을 부르는 것이 싫었고,
반복되는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도 싫어서
가족이 요양원을 방문할 때에도 외면했다.
하지만 이 연극을 보며,
할머니도 참 애잔한 삶을 사셨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그리워졌다.
지금이라도 요양원을 부모님과 함께 찾아뵈고,
할머니가 말씀하시는 것을 묵묵히 들어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