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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융 Oct 11. 2017

종교가 뭐야?

매순간 기도를 하듯 살고 싶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고는 한다.


"종교가 뭐야?" 


그러면 나는 "나는 모든 종교를 믿는다"고 대답한다.

누군가는 또 그러면 나에게 장난 반, 진담 반으로 "귀가 참 얇은가보네" 하고 말한다.



내가 '다 믿는다' 고 할 때, 누군가에게는 이단중의 이단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믿음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믿음이 존재하는 이유, 삶을 버티기 위해 종교를 필요로 하는 그 믿음을 믿는다. 또한 신이라는 존재가 나에겐 우주적인 어떤 존재,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무언가'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 있어 나에게 모든 신은 동일하다. 각기 다른 종교가 '자신들의 신'을 주장하지만, 나에겐 종교마다 믿는 신과, 천문학자가 믿는 우주의 비밀이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물리학이든, 어느 종교든 깊은 곳으로 내려가면, 그들이 말하는 방식은 달라도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비슷함을 느낀다.


생명은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사실 나에게는 물리학이나 천문학도 큰 의미에서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옛날부터 그 두 학문이 신학 혹은 철학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으며, 인간이 존재하게 된 이유를 알고 싶다는 호기심에서 발생한 학문이라는 점은 종교의 발생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종교는 '가르침'이나 종교적 책 속에 있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집중하는 반면, 천문학은 진리에 대한 가능성은 열어 놓으면서도 언젠가는 인간이 우주의 비밀(신)에 대해 보다 더 잘 알게 될 수 있을거라 믿는다. 


 또 그렇게 본다면 천문학자들, 과학자들과 신비학자도 그리 다르게 느껴지진 않는다. 고대 종교도 그러한 성향을 띄었다. 고대 종교를 믿는 이들은 신의 존재를 믿으면서도, 신이 어떤 존재라고 확정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태도를 가지곤 했다.




우리는 불확실성에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나 신에 대한 생각, 우주에 대한 궁금증과 같은 모든 것들이 발생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얼마전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을 둘러싸고 그 사건 자체의 잔혹성보다 더 크게 주목을 받았던 부분은 '범행의 동기'가 오리무중이라는 점이었다. 


종교와 학문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이 작은 지구라는 별에 태어나 있다가 사라지는 것임을, 궁금해하거나 따지는 일 없이 그저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러 세분화된 학문들을 만들어내어, 인간이 이렇게도 복잡한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게 된 이유가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거라 믿게 만든다.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그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라던지, 신의 존재 여부라던지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단지 내 주관적인 경험에 의거해서 내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다. 또한 난 그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사이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뿐이다.


그렇기에 내가 정말 주목하고 싶은 것은, 믿는다는 행위 자체의 힘에 대해서다.


나에겐 삼 년 정도 아프리카, 하이티의 제사 음악을 가지고 작업했던 시기가 있다. 내가 이 때 말하는 '작업'이란, 매일 아침 열시부터 적어도 오후 한시까지 그 음악들 단순히 부르고, 말했다는 것이다. 

사실 단순히 노래를 부른다는 게 말처럼 쉬워야 할텐데, 쉽지가 않다. 잘 부르고자 하거나, 뭔가를 연출하고 꾸미며, 노래가 아니라 나 자신을 고집하는 일 없이, 단지 노래를 '사는 live' 것은 쉽지가 않다. 노래를 부르며, 노래의 삶을 찾아 나가는 것은, 쉬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려웠다.


삼 년간 매일 노래를 불렀다. 처음에는 노래를 '살려고 to live' '노력했었고', 언젠가 부터는 노래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와 동시에, 내 안에서 노래가 살아지기 시작했다. 노래를 '산다live'는 것은 내가 노력한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노력하기에 살아지는 게 아니다. 그저 살아지는 것이다. 삶은 그 자체로 유동성이 있다. 내가 해야할 것이 있다면, 그저 내 자신을 삶에게 내어주는 것 뿐이다.



나에겐 기도를 하는 일도 그것과 같다. 그저 자신이 가진 믿음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그럴때, 기도문은 한낱 글자임에도 불구하고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옆에 앉아 있다보면, 그 기도가 기도자에게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 그때 기도자가 하는 기도는, 기도자의 사슬에 묶인 영혼을 해방시킨다. 가끔 인간 안에, 그 인간의 영혼이 춤을 추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럴 때면 내 안에 무언가가 꿈틀 꿈틀대며 살아나는 새싹같이 고개를 든다. 


"나도 춤추고 싶어" 라는 듯. 


  


"영혼들은 모든 것들에 묶여 있지. 자네에게도 묶인 영혼이 있고, 나에게도 묶인 영혼이 있다네. 자, 여기 이 테이블에도 영혼이 묶여 있어. 기도라는 건, 사슬로부터 묶인 영혼들을 풀어내는 그런 행위야. 그리고 우리 삶의 모든 행동들, 사업을 하거나, 사랑을 나누거나, 아니면 저녁을 함께 먹거나, 뭐 우리가 삶에서 하는 어떤 행동이던지 그런 '기도'가 되어야 한다네... 이 세상의 성사(聖事) 말이야. 근데,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나?"

 영화 '안드레와의 저녁식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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