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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융 Oct 09. 2017

평행관계의 예술과 삶

살아보지 않은 삶에 대한 궁금증은 모두에게 공통점일 것이다.


나에겐 회사 생활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 내가 만약 회사에 직원으로서 취직하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가끔 고개를 든다. 그렇다면 어떤 회사에 취직하게 될까, 어떤 업무를 맡게 될까 등의 질문이 그 뒤를 따른다.


6년 전에 내가 처음 이태리로 출국하기 전, 1년 동안 했던 여러 종류의 아르바이트 중에 삼 개월간 했던 경리 아르바이트가 그나마 회사 생활에 가장 부합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틀에 갇혀 있는 것을 싫어해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대학교마저도 자퇴한 내가 회사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나는 알만한 대학의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던 적이 있다. 그 전에도 예술 고등학교를 입학했지만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은 ‘바닥을 쳐야’하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연기는 기술이 아닌 삶과 맞닿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술고등학교에도, 대학교의 예술전공 학과의 커리큘럼 어떤 곳에도 그런 가르침은 없었다.


 교수는 얼차려를 시켰으며, 선배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100미터 전방에서 보고도 크게 90도로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음 날 학번 전체 집합을 시키곤 얼차려를 시켰다.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고 들었지만 그때 어떻게 그걸 당하면서도 ‘당연히’ 당했는지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자유로워야 할 예술가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규율과 억압과 폭력에 복종하는 삶을 반복해 오고 있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 삶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인간의 존재로부터 멀어져 간다. 규율과 억압과 폭력은 겉치레이다. 인간의 존재는 그 안 깊은 곳의 알맹이에 위치해 있다. 겉치레를 버리지 않으면 결코 우리는 ‘인간’에 도달하지 못한다.


신학은 신에 대해 말하고, 천문학자는 우주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배우와 예술가는 인간에 대해 말한다. 신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해도 우리는 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얘기하기보다, 인간이 신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탈리아에 위치한 극단 오디션에 합격하고 마침내 단원으로서 작업을 시작했을 때 내가 느낀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을 해라 하고 말하는 이도 없었고, 누군가 벌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각자는 각자가 원하는 작업을 할 수 있었고, 작업을 창조해 내고 그것을 발표할 수 있었다. 나는 아주 개인적인 것들을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창조해 내기 시작했다. 내가 글을 쓰고, 내가 나 자신을 감독하고, 그 안에서 연기를 하기보단 그 자체를 ‘살면서’, 내가 지금껏 느낀 어떤 것과도 다른 예술에 대한 인식을 끌어낼 수 있었다. 가끔은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게 가능했나’ 느꼈다. 백지에서 뭔가를 이끌어 내는 건 처음엔 막막했지만, 또 그만큼 나는 자유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작업을 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나에게 이런 작업의 행위는 나를 해방하는 어떤 기도 같은 것이 되었다. ‘~게 보이면 어떻게 하지’라는 두려움에서 ‘어떻게 보여도 좋아’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해방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나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내 삶을 그런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경험했다.


마음을 다해, 자유로이 자신에 대해 말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창조해내면 낼수록, 나는 나의 존재와 더 닿게 됨을 느꼈다. 3년간의 경험은 예술뿐만 아니라 내가 예술에 대해 가졌던 인식을 180도 바꾸어 놓았으며, 나 아가 삶에 대해 완전히 다른 시간을 가지게 해주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예술은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있다 생각했다. 그것이 어디에나 예술가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열 달 동안 아이를 몸속에 품고 있다가 출산해 내는 그 과정에서, 보리밭에서 벼를 베어내는 농부의 손에서, 씨앗을 흙 깊은 곳에 심는 손길에서 예술을 보았다. 명상하는 이의 모습에서 예술을 보았고,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며 조금씩 변화를 거듭하는 인간의 표정에서 예술을 보았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 안에서 자신이라는 존재와 하나가 되었다. 그들의 행위 안에 자신의 자아는 사라지고, 누군가의 시선도, 평가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행위로써 자신의 좀 더 깊은 본질에 맞닿게 된다.


내가 지나 온 여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이 최고임을 말한다. 그만큼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는 뜻 이리라. 내가 만난 화가는 그림은 어떤 예술 활동보다도 큰 예술임을 강조하고, 순환농법을 실천하는 청년 농부는 도시에 사는 이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모지리쯤으로 치부한다. 누군가는 이슬람 율법이 최고라고 말하고, 기독교가 최고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춤추는 행위야 말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행위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요가가 정신수양의 최고봉이라고 말하며 요가나 명상을 하지 않는 이들은 뭔가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명상법이 있는데 저마다 자신의 명상법이 최고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본질이 기본적으로 같은 것임을 느낀다. 그 행위가 최고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그 행위로써 어떤 무아지경의 ‘경지’를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경지’가 열거한 모든 행위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라 거의 확신한다. 그 경지는 그 행위로써 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 행위를 하는 방식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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