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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도착한 한 메일은 나를 깊은 고뇌에 빠뜨렸다. 그 메일은 국내 기계공학 최상위 대학원 석박통합과정에 내가 최종합격했음을 알렸다. 유학과 국내 대학원 진학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조언은 구하지 않았다. 2년 넘게 고민한 끝에 내 목표는 미국 탑스쿨 박사학위 취득으로 굳어진 지 오래였다. 따라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짊어지고 싶었다. 조언은 선택 이후에 구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공손하면서도 명명백백하게 나의 목표와 최종 결정을 담아 정제된 글로 메일을 송부했다. 지도교수님의 답장은 다음과 같았다.
권민재 학생 보세요.
통합과정 진학 의사가 없다는
학생의 뜻을 확인했습니다.
연구실은 권민재 학생이
합류하지 않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학생의 빛나는 미래를 기원합니다.
교수님의 절제된 언어는 긴장감을 조성했다. 연구실 입장에서 나는 영락없는 배신자였다. 합류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면 인턴에게 시간을 쏟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발단은 이러했다. 때는 작년 여름, 국내 연구중심대학 대학원 과정에 입학하고자 컨택메일을 돌리고 있었다. 나를 좋게 봐주신 교수님께서 인턴을 제안하셨다. 공식적 하계 인턴 모집은 끝났기에 전혀 기대하지 않던 일이었다. 두 번의 화상 인터뷰와 수차례의 메일을 주고받은 끝에 인턴 채용이 거의 확정된 순간이었다. 마지막 질문만을 남겨두었다.
연구실에 석박통합 오프닝이 있습니다.
권민재 학생이 석사로 진학하길 원하는지,
석박통합으로 진학하길 원하는지를
잘 생각해 보고 답장 주세요.
진심으로 원하는 연구실이었다. 이유를 대라면 수도 없이 많이 댈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에서는 더 넓은 세상으로 뻗어나가고자 하는 도전정신과 패기 넘치는 열정이 판단을 흐리게 했다. 끝내 송부한 답장에는 석박통합으로 진학하길 희망한다고 적었다.
그랬다. 석사로 진학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가 인턴 기회를 놓쳐버릴까 두려웠다. 그렇게 합격한 한 달간의 인턴을 통해 최선을 다해 배우고 성장했다. 가을학기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류와 구술고사를 통과하고 최종합격 메일을 받았다, 깊은 고뇌 없인 읽을 수 없던 바로 그 메일을.
지금 와서 후회는 없다. 다만 때때로 다른 미래가 펼쳐질 수 있었음에 대한 생각에 잠긴다. 다양한 갈래길 중에 하나를 선택했고, 오롯이 책임을 짊어졌으며, 그 대가로 연구실 연구원들과의 유대감과 우수한 연구 환경을 포기해야 했다. 인턴의 사적인 요청에 흔쾌히 당신의 인생 이야기를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산책하며 들려주신 지도교수님이었다. 그런 존경스러운 교수님의 지도를 감히 포기해야 했다.
나를 좋게 봐주셨기에 소중한 시간을 할애하셨을 것이다. 교수님의 유학 시절 우여곡절은 아이러니하게도 젊은 피로 하여금 도전정신을 불러일으켰다. 나도 그 우여곡절을 직접 겪고 성장하고 싶었다.
한 가지 교훈도 얻었다. 사회생활 하면서 반드시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솔직하지 않은 것은 거짓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관계를 꼬이게 만든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엉켜버리기 전에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결단을 내릴 때 흔들리지 않을 자신만의 잣대가 있어야 하며, 선택에 대한 책임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한다.
'진짜 사회'에 나가기 전에 값진 교훈을 얻어서 다행이었다. 결국 내 미래는 내가 개척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인생의 원동력을 잃지 않을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카라멜 남자, 화이트 초콜릿 여자 010 - 마침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각색되었습니다.
원저작물의 저작권은 브런치 스토리 작가 권민재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