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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Nov 06. 2021

[Il Volo Sings Morricone]

음악 위인의 업적을 여기 단 한 장으로 만난다.

일 볼로 [Il Volo Sings Morricone]



‘일 볼로, 모리꼬네를 노래하다’. 명료한 타이틀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팝페라 트리오 일 볼로(Il Volo)가 이탈리아가 낳은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의 유산을 노래했다. [Il Volo Sings Morricone]는 현재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젊은 음악가들이 이탈리아의 자랑이자 그 자체로 영화 음악을 상징하는 아이콘에게 헌정하는 작품이다.


피에로 바로네(Piero Barone), 이그나치오 보셰토(Ignazio Boschetto), 지앙루차 지노블레(Gianluca Ginoble)로 구성된 일 볼로는 2009년 이탈리아의 경연 프로그램 [티 라시오 우나 칸초네(Ti Lascio Una Canzone)]에서 만나 결성됐다. 이들은 이듬해 정식 데뷔 후 즉시 스타덤에 올랐다. 첫 앨범은 이탈리아 차트 6위를 비롯해 유럽 각국에서 톱 텐에 들었고,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도 10위에 안착했다. 트리오는 성악을 전공하지 않은 평범한 10대 후반 소년들이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안정적인 발성과 매력적인 음색으로 곧장 팝페라의 새 얼굴로 거듭났다. 일각에선 이들을 감히 ‘쓰리 테너’에 빗대기도 했다.



세 청년이 존경의 뜻을 표한 엔니오 모리꼬네는 평생을 영화로, 음악으로 살았다. 그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1960년대부터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무려 500편 이상의 작품을 남겼다. 언뜻 생각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숫자다. 한 해에 20편 이상 작업하던 때도 많았다. 같은 시기에 활동한 누구도 그만큼 많은 결과물을 내진 못했다. 이렇게 다작을 하면서도 꾸준히 명작을 만들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마에스트로는 오랜 세월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창의력을 뽐냈고, 천재적인 감각으로 시대의 멜로디를 썼다.


그래서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은 영화 없이도 살아 숨 쉰다. 설령 그가 작업한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그의 음악 하나쯤은 안다. [석양의 무법자](1966)를 못 봤다고 해서 사막의 하이에나를 묘사한 그 유명한 프레이즈도 못 들어봤을까. [미션](1986)의 ‘Gabriel’s Oboe’, [시네마 천국](1988)의 ‘Love Theme’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음악은 발표 이래 각종 광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에 수없이 삽입되며 매년 새로운 대중을 만났다. 현대의 클래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스타워즈],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등의 음악을 만든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 정도를 제외하면 지난 세기 이와 같은 지위를 얻은 영화 음악가는 단연코 없다.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


유일무이했던 인물은 2020년 7월 6일 작고했다. 그의 삶은 마지막까지 영화 같았다. “나, 엔니오 모리꼬네는 죽었습니다. 늘 가까이 지낸 친구들과 한동안 만나지 못한 모든 분께 제 부고를 전합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직접 작성한 글을 통해 그를 사랑한 세계인에 마지막 인사를 건넸고, 가족과 지인들에게 사랑을 담아 작별을 고했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영화 음악을 통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게 됐다는 한스 짐머(Hans Zimmer)는 “그를 보지 못하더라도 그는 언제나 들려올 것”이라는 추도사로 거장을 기렸다.


거목이 쓰러진 후 세계 각지에서는 트리뷰트의 움직임이 일었다.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헌정 공연이 열렸다. 팬데믹으로 세상이 얼어붙은 상황에도 추모 열기는 계속됐다. 그중에서도 특히 관심이 쏠린 공연은 이탈리아의 직속 후배 일 볼로가 개최한 트리뷰트 콘서트였다. 지난 6월 5일 이탈리아 베로나의 베로나 아레나에서 열린 [IL VOLO – Tribute to ENNIO MORRICONE] 공연은 이탈리아의 텔레비전 채널 ‘Rai 1’에서 실시간으로 중계되며 화제를 모았다. 이날 방송의 시청률은 25.8%를 기록했고 약 470만 명에 달하는 시청자가 방송을 지켜봤다. 엔니오 모리꼬네에 관한 가장 성공적인 트리뷰트 공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 볼로와 엔니오 모리꼬네는 10여 년 전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데뷔 앨범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글로벌 활동을 펼치고 있던 세 사람은 2011년 11월, 이탈리아의 포폴로 광장에서 열린 엔니오 모리꼬네의 콘서트 무대에 올랐다. 그룹은 마에스트로의 지휘에 맞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의 테마곡에 가사를 붙인 ‘E Più Ti Penso’를 불러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날 이후 ‘E Più Ti Penso’는 트리오가 공연에서 자주 부르는 곡 중 하나가 됐다. 그런가 하면 올해 3월 열린 [산레모 음악제] 축하 무대에선 [옛날 옛적 서부에서](1968)를 테마로 한 ‘Your Love’를 불러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산레모 음악제]는 1951년부터 열린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음악제로, 2015년에는 일 볼로가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Il Volo Sings Morricone]는 이러한 흐름에서 탄생했다. 일 볼로는 거장의 작품을 재해석하는 일이 영광인 동시에, 책임감이 느껴지는 도전이었다고 밝혔다. 아마 앨범을 위해 레퍼토리를 구성하는 것부터 상당한 고민이 따랐을 것이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60여 년을 14곡으로 압축한 일 볼로의 선곡은 음악가의 커리어 전반을 아우른다. 창의적인 실험성이 돋보인 초기 스파게티 웨스턴 걸작부터, 낭만과 서정성으로 기억되는 후기의 명곡들까지, 그야말로 핵심만 챙긴 ‘엔니오 모리꼬네 에센셜’이다. 여기에 엔니오 모리꼬네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로마 신포니에타 오케스트라(Roma Sinfonietta Orchestra)가 마르셀로 로타(Marcello Rota)의 지휘에 맞춰 앨범을 빛냈다. 알찬 선곡과 뛰어난 연주자, 가수가 만났으니 더할 나위 없다.


특기할 점은 엔니오 모리꼬네의 아들 안드레아 모리꼬네(Andrea Morricone)가 앨범에 힘을 보탰다는 것이다. 일찍이 아버지와 함께 작업한 [시네마 천국] 중에서 ‘Love Theme’를 작곡하며 재능을 입증했던 그는 본 작품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다. 안드레아 모리꼬네는 일 볼로를 위해 [석양의 무법자]를 테마로 한 ‘The Ecstasy of Gold’에 그만의 가사를 붙였고, 미공개 신곡 ‘I Colori Dell’amore’를 제공했다. ‘I Colori Dell’amore’는 베로나 아레나에서 열린 일 볼로의 엔니오 모리꼬네 추모 공연에서 첫선을 보이며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킨 곡이다. 안드레아 모리꼬네의 참여로 헌정 앨범의 의미는 더욱 깊어졌다.


'The Ecstasy of Gold'


앨범은 오프닝부터 압도적이다. 듣는 이를 단숨에 서부극의 한복판으로 데려가는 첫 곡 ‘The Ecstasy of Gold’에서 새삼 엔니오 모리꼬네의 위대함을 다시 느낀다. [석양의 무법자]를 대표하는 멜로디를 인트로와 곡 중간에 배치하고, 솔로 가수의 멜리스마와 합창으로 이루어진 원곡에 가사를 붙여 팝송의 구성을 택한 작법도 인상적이다. 마치 뮤지컬 넘버를 듣는 듯 극적인 편곡이다. 본 앨범에 앞서 싱글로 미리 공개된 [옛날 옛적 서부에서]의 ‘Your Love’에선 세 가수의 무르익은 하모니가 두드러진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작품 중 단일 곡으로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단연 ‘Nella Fantasia’다. [미션]의 ‘Gabriel’s Oboe’에 가사를 붙인 이 곡은 1998년 사라 브라이트만(Sarah Brightman)을 시작으로 수많은 가수가 저마다의 해석을 내놓았다. 과연 선율의 마법사가 만든 역작이라고 할 만하다. 일 볼로의 버전에선 풍성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누비는 플루트의 라인이 귀에 들어온다. 플루티스트 안드레아 그리미넬리(Andrea Griminelli)의 솜씨다. 플루트와의 산뜻한 협연은 오보에가 이끄는 원곡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며 신선한 재미를 선사한다.


마에스트로의 작품 중엔 영화보다 음악이 앞서는 경우도 많다. ‘Metti una sera a cena’도 그중 하나다. 1969년 영화 [어느 날 밤의 만찬]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지만, 동명의 주제곡 ‘Metti una sera a cena’의 존재감은 여전히 막강하다. 오직 3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보사노바는 쉽고 감미로운 멜로디 덕분에 많은 음악가의 커버 대상이 됐다. 일 볼로는 브라질 출신 여성 배우 플로린다 보우캉(Florinda Bolkan)의 1969년 싱글 버전에 기초한 재해석에서 탄탄하고 풍요로운 중음역으로 듣는 이를 매혹한다.



[시네마 천국]의 ‘Love Theme’에 노래를 붙인 ‘Se’는 투첼로(2Cellos)의 멤버 하우저(HAUSER)의 참여로 더욱 특별해졌다. 애절한 첼로 전주가 흘러나오는 순간 사실상 승부는 끝난다. 노래는 한마디로 낭만과 서정, 노스탤지어의 결정체다. 영화 속 ‘Love Theme’의 멜로디가 극장 공기를 바꿔놓았듯, 도입부 첼로를 지나 노래가 시작되면 듣는 사람의 마음도 이전 같을 수 없게 된다. 세 가수의 탁월한 표현력은 말할 것도 없다.


비극적인 러브스토리 [칼리파 부인](1970)의 테마곡을 노래로 바꾼 ‘La Califfa’의 재해석도 흥미롭다. 바이올리니스트 데이비드 가렛(David Garrett)의 바이올린 연주가 원곡의 메인 악기 오보에를 대신해 곡을 리드하면, 세 사람의 부드러운 톤이 편안한 감상을 돕는다. 그런가 하면 영국의 텔레비전 시리즈 [노스트로모](1997)의 ‘Conradiana’에선 트리오의 드라마틱한 가창이 몰입을 유도한다. 그룹의 역량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앨범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E Più Ti Penso’다. 비단 엔니오 모리꼬네와 그룹의 인연이 시작된 곡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원곡의 아름다운 멜로디와 이를 담아낸 오케스트레이션, 섬세한 가창의 조화가 완벽에 가깝다. 그동안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와 아리아나 그란데(Ariana Grande)를 포함한 여러 가수가 각자의 해석을 내놓았지만, 일 볼로의 버전은 가히 ‘역대급’이다. 특히 곡 후반 옥타브를 올려 가볍고 단단한 고음을 구사하는 이그나치오 보셰토와 이어지는 지앙루차 지노블레의 낮은음은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노래의 감상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공연장에서라면 탄성이 터져 나올 순간이다.


레퍼토리는 거장의 사운드트랙 이상을 포괄한다. 3인조는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칸초네 가수 미나(Mina)가 1966년에 발표한 ‘Se Telefonando’, 미국의 솔(soul) 가수 아미 스튜어트가 1990년 엔니오 모리꼬네 헌정 앨범에서 부른 ‘Come Sail Away’, [시네마 천국]의 선율을 빌려 뉴질랜드의 소프라노 헤일리 웨스튼라(Hayley Westenra)가 부른 ‘Would He Even Know Me Now?’, 포르투갈의 파두 가수 둘체 폰테스(Dulce Pontes)의 2003년 오리지널 ‘Amalia Por Amor’까지 살뜰히 챙겼다. 엔니오 모리꼬네가 영화 [사코 & 반젯티](1971)를 위해 만든 곡에 포크의 전설 존 바에즈(Joan Baez)가 가사를 쓰고 노래한 ‘Here’s To You’는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에 맞춰 새 단장을 했다. 정성 어린 커버 곡과 원곡을 비교해서 들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마지막 곡 ‘I Colori Dell’amore’는 안드레아 모리꼬네가 선사한 신곡이다. 아들 안드레아 모리꼬네가 아버지 엔니오 모리꼬네의 작품을 기억하고 근사하게 재해석한 젊은 유망주들에게 주는 선물인 셈이다. 일 볼로의 세 멤버는 비장미가 느껴지는 단조 선율에서 격정적으로 ‘사랑의 색’을 노래하며 앨범을 마무리한다. 생전 아들과 함께 작업하기도 했던 거장의 유산을 아들이 이어간다는 점에서 헌정 앨범으로 더없이 걸맞은 엔딩이다.  



일 볼로는 누구나 알지만 섣불리 도전하기 어려운 엔니오 모리꼬네를 고감도의 대중 터치로 풀어냈다. 이들은 오리지널의 멋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팀의 개성을 충분히 입혔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Il Volo Sings Morricone]는 성공적인 오마주다. 앨범을 들으며 엔니오 모리꼬네가 얼마나 천재적인 음악가였는지 다시 한번 실감한다. 그는 멜로디의 신이었고, 당대 영화 음악의 방향을 제시했으며, 결국 불멸의 신화가 됐다. 음악 위인의 업적을 여기 단 한 장으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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