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문턱에서
여름이 온다.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 꽃잎 날리던 봄이 지나고 공기 중에 다시 후텁지근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새벽같이 떠오르는 태양, 한낮의 작열하는 햇볕, 잠 못 이루는 열대야가 찾아올 것이다. 산과 바다에는 피서객이, 냉면 집과 백숙 집에는 저마다의 방법으로 더위를 쫓으려는 이들이 몰릴 테다. 찌는 더위를 날리는 각종 페스티벌, 한강 둔치를 바라보며 즐기는 ‘치맥’도 우리를 기다린다.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전, 여름의 문턱에서 듣기 좋은 노래를 소개한다. 가요와 팝,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기분 좋게 더워진 공기, 적당히 촉촉한 습도에 어울리는 감수성 가득한 10곡이다.
김현식 – ‘여름밤의 꿈’ | [김현식 4집](1988)
‘여름’ 하면 떠오르는 노래에 댄스곡이 많다면, ‘여름밤’에는 단연 ‘여름밤의 꿈’이다. 언더그라운드의 스타, 영원한 ‘가객’(哥客) 김현식의 곡은 그가 1988년 발표한 4집 [김현식 4집]에 실렸다. ‘비처럼 음악처럼’, ‘사랑했어요’ 등 김현식의 다른 인기곡들이 그의 호소력 짙고 야성적인 음색을 부각했다면, 이 노래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그를 만나기에 적격이다. 1990년대에 큰 사랑을 받았던 싱어송라이터 윤상의 작곡 데뷔곡이기도 한 이 곡은 ‘가리워진 길’과 함께 김현식의 대표적인 팝 발라드로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훗날 아이유가 첫 번째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2014)에서 재해석하며 변함없는 곡의 가치를 증명하기도 했다.
더 클래식 – ‘여우야(女雨夜)’ | [The Classic 2](1995)
김광진, 박용준으로 구성된 더 클래식은 ‘마법의 성’(1994) 한 곡만으로도 잊을 수 없는 팀이다. 놀라운 데뷔곡을 발표한 이들의 후속 작은 ‘여우야(女雨夜)’였다. 김광진의 고급스러운 멜로디, 박용준의 완성도 높은 편곡도 훌륭했지만, 조동익(베이스), 함춘호(기타), 김영석(드럼) 등 ‘드림팀’의 연주가 환상적이었다. 점잖지만 현란한 베이스와 탄력 있는 드럼, 너무나도 예쁜 피아노까지! 확실히 이들은 이지 리스닝에도 격이 있음을 설파했다. ‘마법의 성’에 버금가는, 한 편의 동화 같은 가사 역시 곡의 매력이다. 노래는 엠넷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3](2011)에서 김예림, 도대윤의 투개월이 리메이크하며 새 생명을 얻기도 했다.
윤종신 – ‘야경’ | [동네 한 바퀴](2008)
누구나 높은 곳에 올라가 아경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번쩍번쩍 빛나는 대도시의 밤, 반딧불이의 작은 빛과 개구리 우는 소리가 어우러진 전원의 풍경…. 소박한 이별 언어의 대가 윤종신은 한밤중 ‘나의 도시’에 올라가 ‘방금 전까지 날 괴롭히던, 그 미로 같던 두통 같던 그곳’을 내려다본다. 그곳에서 보니 ‘수많은 불빛 그곳에 모두 사랑하고 미워하고 실망하고’ 산다며 자신의 이별도 그중 하나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윤종신은 이별 후 ‘찌질’의 극치를 보여준 ‘좋니’(2017)로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그는 본래 이처럼 생활 속 한 장면을 밀도 높게 포착해 담담하고 먹먹한 그림을 그리는 것에 능한 이야기꾼이다.
샤이니 – ‘투명 우산’ | [1 of 1](2016)
샤이니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형형색색의 패션과 ‘칼군무’에 집중되어 있다. 2016년 이들의 5집 [1 of 1](2016)에 수록된 ‘투명 우산’은 그러한 고정 관념을 깨기에 알맞은 곡이다. 전축에 엘피판을 올려놓은 듯 지글대는 소리로 시작해 아련한 피아노 컴핑으로 끝나는 노래는 평소 대중의 기억 속 샤이니의 모습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한껏 기합 들어간 퍼포먼스는 간데없이, 눈물에 번져가는 이별 풍경을 선명하게 그린 노랫말과 서정적인 멜로디를 듣고 있으면 순정 만화의 한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비 내리는 초여름의 서늘한 어느 날을 닮아있는 이 노래는 ‘방백’, ‘너의 노래가 되어’로 이어지는 샤이니 표 감성곡의 최고봉이다.
김오키 – ‘고향의봄’ | [퍼블릭도메인포미](2018)
제목을 보고 ‘혹시?’ 했다면, 맞다. ‘나의 살던 고향은’으로 시작하는 홍난파의 가곡 ‘고향의 봄’이다. 노래는 아방가르드 스타일의 강렬한 연주를 주로 구사했던 색소포니스트 김오키가 처음으로 발매한 발라드 앨범 [퍼블릭도메인포미](2018)에 수록되었다. 우리 귀에 익숙한 선율을 중심으로 색소폰과 더블베이스(전제곤), 피아노(진수영)가 번갈아 가며 연주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괜스레 옛 생각을 떠올리며 분위기를 잡게 된다. ‘재즈는 어렵다’는 기존의 생각은 버리고, 개성을 십분 살려 능숙하게 호흡을 맞추는 연주자들이 이끄는 대로 편안히 마음을 맡겨보자.
The Beatles – ‘Here Comes The Sun’ | [Abbey Road](1969)
비틀스의 수많은 명곡이 레논 - 매카트니의 콤비 플레이로 탄생했지만, 이 노래는 조지 해리슨에 의해 세상에 나왔다. 그와 절친한 사이였던 에릭 클랩튼의 별장 정원에서 염소들이 거닐고 태양이 빛나는 것을 보고 있던 조지 해리슨은 ‘태양이 떠오르네’로 시작하는 구절을 떠올렸고 이를 노래로 옮겼다. 멤버들의 불화, 매니저의 죽음 등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던 조지에게 이 노래는 희망의 찬가와도 같았다. 당시로썬 혁명적이었던 무그 신시사이저의 어여쁜 소리 장식이 돋보이는 이 노래는 언제 들어도 금방이라도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기분을 준다.
Fleetwood Mac – ‘Dreams’ | [Rumours](1977)
거부할 수 없는 멜로디의 힘!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반 [Rumors](1977)에 수록된 ‘Dreams’는 플리트우드 맥의 가장 큰 히트곡이자 대표곡 중 하나다. 연인 관계였던 팀의 멤버 린지 버킹햄과 스티비 닉스가 결별한 후 스티비 닉스가 만든 노래에는 이별을 겪은 그의 심경이 오롯이 담겼다. 결연하면서도 어딘지 씁쓸한 노랫말은 차분한 리듬, 군더더기 없는 매끈한 선율과 만나 더욱 강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특히 천둥은 오직 비가 내릴 때만 친다고 말하는 후렴에 이르러 음향을 가득 채우는 멤버들의 하모니를 놓치지 말 것.
TLC – ‘Waterfalls’ | [CrazySexyCool](1994)
TLC 이후에 등장한 많은 걸그룹은 이들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힙합, 알앤비, 뉴 잭 스윙을 앞세운 음악은 직후의 여러 아이돌에게 영감을 줬고, 당당하고 거침없는 ‘걸 크러쉬’ 콘셉트, 힙합을 기반에 둔 패션은 지금까지도 양분이 되고 있다. 지난해 마지막 앨범 [TLC](2017)를 발매하며 역사가 된 이들의 명곡 ‘Waterfalls’는 산뜻한 브라스 세션과 유려한 흐름으로 편안한 감상을 유도한다. 그렇다고 메시지까지 여유롭진 않다. ‘폭포를 쫓기보단 당신에게 익숙한 강과 호수에 머무르라’ 말하는 노래는 마약과 에이즈 감염이 만연해있던 당시 미국 사회에 날리는 준엄한 경고였다.
Zac Efron & Zendaya – ‘Rewrite The Stars’ | [The Greatest Showman OST](2017)
작년 말에 개봉한 뮤지컬 영화 [위대한 쇼맨](2017)은 영화보다 음악이 주목받은 사례다. 그리 높지 않았던 영화의 흥행 스코어와 달리, 사운드트랙 앨범은 미국과 영국 차트를 모두 석권했고, 음반 불황기에도 100만 장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다. ‘The Greatest Show’, ‘This is Me’ 등이 사랑받았지만, 그중 [하이스쿨 뮤지컬](2006)의 스타 잭 에프론과 할리우드의 떠오르는 배우 겸 가수 젠다야가 함께 부른 ‘Rewrite The Stars’를 추천한다. 극 중 서로 사랑하면서도 사회적 한계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운명을 바꿔보자’며 부르는 노래에는 벅찬 감동과 끓어오르는 에너지가 존재한다.
Sufjan Stevens – ‘Mystery of Love’ | [Call Me By Your Name OST](2017)
연인에게 “네 이름으로 날 불러줘, 나도 내 이름으로 널 부를게”라고 말하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에 삽입된 곡이다. 포크와 체임버 팝, 일렉트로닉을 오가며 독창적인 음악으로 이름을 알린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수프얀 스티븐스는 영화를 위해 2곡의 오리지널 곡을 선사했는데, 그중 하나가 ‘Mystery of Love’다. 어쿠스틱 기타, 벤조, 현악기, 피아노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노래에는 영화를 지배하는 달콤하고도 위태로운 사랑의 감정이 섬세하게 담겨있다. 노래 속 공기를 다량 머금은 수프얀 스티븐스의 목소리에는 찌르르 전류가 흐르는 것만 같다.
우리는 넘쳐나는 정보 속에 살고 있지만, 정작 지금 필요한 것, 나만을 위한 알짜는 놓치기 쉽다. 음악도 그렇다. 하루에 발매되는 노래만 100여 곡에 이르기 때문에 이를 모두 들어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늘 뭐 듣지?’ 고민하는 당신, 여기 있는 노래만 들어도 당장의 선곡 고민은 해결이다.
텐아시아 뷰티텐 잡지에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곡만은 듣고 가]라는 제목으로 매월 주제에 맞는 8곡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첫 회는 분량이 정해지지 않아 10곡을 골랐으나 다음 회부터는 8곡이 들어갑니다. 글 분량 또한 실제 잡지에 실린 것은 이보다 짧습니다만, 블로그에는 원본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