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 멜론, 출판사 태림스코어가 공동으로 기획한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 선정과 리뷰에 참여했습니다. 리스트는 8월 28일부터 한 달 동안 매주 화요일, 금요일 정오에 멜론에서 열 장씩 공개됩니다. 가을에는 도서로도 출판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기대 바랍니다.
수많은 아이돌 그룹 중에서도 2009년에 데뷔한 에프엑스(f(x))의 입지는 특별했다. 데뷔곡부터 주재료로 삼은 일렉트로니카, 랩과 노래의 경계에서 넘실대는 창법, 난해한 노랫말 등 이전의 어떤 팀에서도 본 적이 없는 독특함이 이들의 무기였다. 2010년 발표한 ‘NU ABO’에서 정체성을 선명히 드러낸 그룹은 ‘피노키오(Danger)’와 ‘Hot Summer’, ‘Electric Shock’를 거치며 자신만의 브랜드를 공고히 했다. 음악과 콘셉트의 측면에서 에프엑스 같은 팀은 당시에도, 그 이전에도 없었다.
이와 같은 포지셔닝은 정규 2집 <Pink Tape>에서 정점을 보였다. 앨범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밝혀지기 전에 공개한 ‘아트 필름’부터 파격이었다. 오직 프로모션을 위해 제작된 2분 남짓의 영상물은 신곡을 배경으로 다양한 오브제를 감각적으로 배치, 구성해 에프엑스만의 캐릭터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화면 속 환상적, 동화적이면서 천진난만하고 패셔너블한 모습은 역시 지금까지의 걸 그룹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성격이었다. 에프엑스의 이러한 캐릭터 구축과 활용은 2010년대 아이돌 음악 시장에서 걸 그룹 콘셉트의 다변화로 이어졌다.
영리한 비주얼 연출만큼이나 음악적 기획 또한 뛰어났다. 이 무렵 SM엔터테인먼트는 해외 작곡가들을 대거 섭외하고 국내외 작곡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곡을 제작하는 대규모 ‘송라이팅 캠프’를 본격적으로 진행했는데, <Pink Tape>는 해당 프로젝트가 앨범 단위로 거둔 중대한 결실이었다. 외국 작곡가의 곡을 한국 작곡가가 국내 시장에 맞춰 다듬고 발표하는 것은 에스이에스(S.E.S.)의 ‘Dreams Come True’(1998)부터 존재한 작업 방식이나, <Pink Tape>는 한 장의 앨범 자체가 ‘송라이팅 캠프’를 통했다는 점에서 달랐다. 글로벌 대중을 공략함과 동시에 작품성 획득을 꾀한 것이다.
그렇게 국제 합작으로 탄생한 12곡의 수록곡은 ‘웰메이드 케이팝’의 본보기였다. 앨범은 복잡하게 쪼갠 리듬 패턴과 예상치 못한 전개가 돋보인 타이틀곡 ‘첫 사랑니(Rum Pum Pum Pum)’부터 덥스텝과 트랩, 하우스 등 EDM 소스를 적소에 활용한 ‘Toy’, ‘Kick’, ‘Airplane’, ‘Step’과 같은 고감도 일렉트로닉 댄스 팝이 주를 이뤘다. 엑소(EXO)의 디오(D.O.)가 참여한 어쿠스틱 팝 ‘Goodbye Summer’, 멜로디 진행에 역점을 둔 ‘여우 같은 내 친구(No More)’, 곡 전반에 사용된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를 통해 신선도를 높인 미디엄 템포 ‘Ending Page’는 음반의 짜임새를 높이는 데 일조한 노래였다.
<Pink Tape>는 대형 기획사의 정교한 제작 시스템이 가진 순기능을 보여줬다. 이는 때로 아이돌 산업 전반에 대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나, 유니크한 캐릭터를 꾸미고 국내외의 실력자를 모아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이들이기에 가능한 ‘케이팝 블록버스터’와 다름없다. <Pink Tape>는 이러한 웰메이드 프로듀싱의 결과이자 순수하게 음악만으로도 앨범 단위의 즐거움을 안긴 야심작이다. 20년 남짓한 한국의 아이돌 음악 역사에서 이 정도로 선명한 시금석이 된 앨범은 그리 많지 않다.
* 추천 곡 : ‘첫 사랑니’
첫사랑의 경험을 사랑니에 빗댄 발상부터 신선했다. 중의적인 가사는 첫사랑의 설렘으로도, 사랑니의 고통으로도 이해가 가능하다. 여기에 노래와 랩, 그리고 그 중간을 유연하게 오가는 멤버들의 가창은 익히 경험한 에프엑스 고유의 스타일이었다. 퍼커션의 변칙적인 사용으로 리드미컬한 재미를 만들면서, 귀에 꽂히는 후렴을 통해 흡수력을 높인 것이 성공 포인트. 실험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과연 에프엑스이기에 가능했던 고품격 댄스 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