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구두,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반짝반짝하는 붉은 잔상. 흐릿하게 들리는 달그락달그락 소리. 풀빛과 대비되어 빨간 무언가가 반짝이며 경쾌하게 움직인다. 달각달각, 마치 마른 뼈가 부딪히는 것 같은......
빨간 구두는 춤을 추며 깊은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 p. 180
어렸을 적 빨간 구두를 읽고 이게 뭐지 하던 중 가장 궁금했던 것은, 그래서 그 구두는 어떻게 되었어? 였다. 그 안에 있을 카렌의 발은? 영원히 그렇게 세상을 떠돌며 - 왠지 숲에서만 돌아다닐 것 같긴 하다 - 춤추는 걸까. 녹색 숲에서, 아니면 하얀 눈이 쌓인 자작나무 숲에서 춤추는 구두. 만약 누군가가 그 구두를 발견하면? 그 구두를 잡을 수 있을까, 잡으면 어떻게 될까.
나에게 빨간 구두는 예쁜 이미지의 악몽 같은 동화다. 여덟 살 생일에 안데르센 동화집을 선물로 받고 정말로 좋아했지만 (그 이후 어린이가 용돈을 열심히 모아서 일곱 권짜리 안데르센 동화 완역판을 샀을 만큼) 모든 동화를 다 활짝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돼지치기 왕자> 같은 동화는 매우 찜찜했고, <빨간 구두>나 빵을 밟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는 그 아름다운 표면을 들춰내면 뭔가 끔찍한 것이 있을 것 같았다. 읽다 보면 어째서??? 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싶고 왜 이런 결말로 만족해야 하는가 싶었던.
마리아 타타르의 주석 달린 안데르센 동화에서 <빨간 구두>를 '어린이문학 중 가장 불안한(disturbing) 이야기'라고 해서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했다. 어릴 때는 공주님의 빨간 구두와 카렌의 구두에 대한 묘사에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두근거리게 예뻤던 것과는 별개로, 묘하게 무섭다고 - 쎄하다? - 생각했다. 특히 빨간 구두가 마지막까지 어떻게 된 건지 나오지를 않아... 지금 생각해 보면 저 감상은, 아마도 어릴 때라서 불합리하다는 것을 잘 몰라서 그렇게 느낀 것이지 않나 싶다.
<빨간 구두>에는 세 켤레의 빨간 구두가 나온다. 어린 카렌을 위해 이웃 할머니가 만들어준 빨간 구두, 공주님의 빨간 구두, 공주님의 빨간 구두를 동경한 다른 소녀를 위해 만들어진, 하지만 그 소녀가 아닌 카렌을 홀린 빨간 구두.
구두를 만드는 할머니 한 분이 마을 한가운데 살았습니다. 할머니는 빨간 천조각으로 조그만 구두 한 켤레를 만들었어요. 솜씨는 아주 서툴렀지만, 이 빨간 구두는 소녀에게 주려고 만든 것 이랍니다. 그 소녀의 이름은 카렌이었습니다. - p. 173
첫 번째 빨간 구두는 초라하지만 따뜻하다. 혼자가 된 어린 소녀를 위로해 주려고, 작고 차가운 발을 감싸주려고 만든 조그만 구두. 어린 소녀가 차가운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을 걱정하며 만든 구두. 나막신 밖에 없었던 카렌은 이 빨간 구두를 신고 어머니의 관을 따라 걷는다. 카렌은 이 구두가 자기를 좋은 곳(친절한 노부인의 집)으로 인도했다고 생각한다. 이 구두에 대해서는 천사도 침묵하겠지. 다만 카렌을 거두어준 노부인만이 '보기 싫다'며 버리라 한다.
공주님의 빨간 구두는 판본에 따라 생략하는 경우도 있던데, 나는 이 구두가 이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공주는 옷자락이 긴 예복도 입지 않았고 머리에 금관도 쓰지 않았어요. 그저 하얀 옷에 모로코가죽으로 만든 아름다운 빨간 구두를 신었을 뿐이었지요. 공주의 빨간 구두는 가난한 구둣방 할머니가 카렌에게 만들어 주었던 빨간 구두와는 정반대로 아주 예쁜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구두도 공주의 빨간 구두보다 예쁠 것 같지 않았어요. - p. 174
푸른 풀밭에서 아른아른 춤추는 빨간 구두 이미지는 이 공주님 묘사에서 파생되어 내 머릿속에 들어온 게 분명하다. 미의식도 경험으로 기르는 것이니, 공주의 하얀 옷과 구두는 카렌에게 커다란 충격이지 않았을까. 그 충격적인 아름다움은 빨간 구두로 형상화되고 카렌은 그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이것은 허영심일까? 그렇다면 공주는? 공주의 구두를 따라서 빨간 구두를 주문한 소녀는?
그 가운데 공주가 신었던 것과 같은 빨간 구두 한 켤레가 있었어요. 정말 얼마나 예쁜 구두인지 모른답니다. 구둣방 주인은, 그 구두가 어느 백작의 따님을 위해 만든 것인데 발에 맞지 않았다고 말했어요. - p. 175
영원히 춤을 추며 손가락질당할 정도의 죄는 무엇일까. 결국 발목을 잘라야 할 정도로 카렌이 잘못했을까? 세례식에 빨간 구두를 신고 간 것, 기도를 하면서도 내내 빨간 구두만 생각한 것, 노부인의 말을 어기고 영성체를 받으러 갈 때도 빨간 구두를 신은 것. 어렸던 내가 그래도 이건 좀 잘못했네, 싶었던 것은 아픈 노부인의 간호를 하지 않고 빨간 구두를 신고 무도회로 간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빨간 구두를 신고 춤을 추며 끌려 다니다가 검을 가진 천사에게 저주받고 결국 스스로 발목을 잘라달라고 애원할 정도의 죄가 되는가?
천사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엄숙했습니다. 천사는 반짝거리는 큰 칼을 들고 있었어요. 천사가 이렇게 말했지요. "계속 춤을 추어라! 넌 죽을 때까지 그 빨간 구두를 신고 춤을 춰야 해. 피부가 오그라들고 해골만 남게 될 때까지 말이다! 춤을 추며 이 집 저 집 문간을 돌아다니게 될 거야. 그리고 버릇없는 아이가 있는 집을 찾아가, 그 아이가 너를 보고 버릇을 고치도록 해야 해. 그래, 계속 춤을 추면서 말이야!" - p. 179
(빨간 구두에 보석 장식이라도 달았으면 단테의 지옥 제4층까지 단숨에 내려갈 수 있을 듯)
허영은 카렌의 죄의 껍데기에 불과하다. 카렌이 지은 죄는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탐하는 것 (버릇없는 아이)'이다. 카렌에게 허락된 것은 검은 구두와 단정한 옷이다. 하지만 카렌은 공주의 모로코가죽으로 만든 반짝이는 빨간 구두와 하얀 옷을 보았다. 그저 동경만 했을 수도 있지만 '그 구두를 탐할 자격이 있는 다른 소녀 (어느 백작의 따님)가 주문했던, 하지만 맞지 않았던 구두'를 가질 수 있는 기회(유혹?)가 다가왔다. 카렌은 그 아름다움에 홀렸고, 손을 뻗었다. 천사가 벌하는 것은 결국 그것이다.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탐한 죄. 그것이 구두처럼 사소한 것이라도. 카렌이 낮은 계급의 어린 여성이라는 것은 그 죄를 더 부풀린다.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은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탐했던 카렌은 발목이 잘리고 결국 '집안의 천사'가 되었다. 겸손하고, 수수하고, 아름답고 화려한 것에는 고개를 흔들고 자신의 분수에 맞는 것만을 받아들이는 사람. 종교에 진심이 되긴 했지만, 글쎄, 자신의 발을 잃고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는데 종교라도 붙잡게 되지 않을까.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조그맣고 귀여운 아이었어요. - p.173
여전히 '빨간 구두'를 동경하고 가지려 하는 사람들은 고난을 겪는다. 비난을 퍼붓고 심심치 않게 그 발목을 자르겠다 한다. 현실의 카렌들은 노력과 대가를 치르고 있음에도. 하지만 격려도 듣는다. 영원히 춤출 것이라는, 발목을 자르지 않으면 멈출 수 없다는 협박은 점점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고 믿고 싶다.
새롭게 옮긴 세계명작2 안데르센동화집, 한기찬 옮김, 현암사 (1988): 본문의 발췌한 문장은 모두 이 책에서 가져왔습니다. '읍'을 '습'으로 바꿨습니다.
The annotated Hans Christian Andersen, edited with an introduction and notes by Maria Tatar, Norton (2008)
(주석 달린 안데르센 동화집, 현대문학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