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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j Nov 13. 2022

반란이든, 혁명이든, 무엇이든!

열두 명의 춤추는 공주들, 그리고 알비나와 스물아홉 명의 공주들


어느 왕국에 열두 명의 공주들이 있었다. 밤이면 열두 명의 공주들은 커다란 방에서 함께 잠든다. 그런데 아침이 되면 공주들의 무도화 바닥이 밤새 내내 춤을 춘 것 마냥 닳아 있다. 누구도 공주들이 한밤중에 대체 어디서 춤을 추었는지 모른다.


The Twelve Dancing Princesses, illustrated by Errol Le Cain

 

도쿄의 하쿠넨 百年 서점에서 우연히 에롤 르 캥(=ELC)의 <눈의 여왕>을 데려온 후 (그때 ELC를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의 삽화가 들어간 책을 아마존에서 검색했다. 생각보다 책이 별로 없었는데 <춤추는 열두 명의 공주들>이랑 T. S. 엘리엇의 '용감한 고양이 Growlitiger'에 대한 시에 ELC 삽화가 붙은 책 정도가 적당한 가격(중고서적)으로 올라와 있어서 주문했다 (그리고 2달쯤 뒤에 받음). <열두 명의 춤추는 공주들>은 어릴 때 읽었던가 아닌가 가물가물하다. 읽었는데  그때는 그다지 인상 깊지 않았던 걸까. 하지만 디테일은 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한데. 공주님들이 모여서 잠드는 침실 묘사 라던가,  뒤에 나오는 보석 가지나 마법의 숲, 호수의 묘사 같은 것도 그렇고.


ELC의 삽화는 멋지고 좋지만 - 표지의 공주들은 어렸을 때 소중하게 가지고 있었던 작은 인형 펜던트와 비슷하다. 드레스 디테일도 귀엽고, 동그랗게 묘사된 공주들 침실이며, 공주들 각각 자는 포즈가 다양한 것 하며... - 읽다 보니


- 12명이라니. 다 같은 왕비 소생인가. 어머니가 다른가?

- 왕자는 없는 듯하고, 그러면 누가 왕위 후계자인가.

- 12명이니 첫째 공주와 막내 공주의 나이차는 적어도 6살 (어머니가 같고 모두 쌍둥이인 경우. 저 시대에 세 쌍둥이 이상이면 어머니도 아기들도 살아남기 힘들 테니)인데 왜 아무도 결혼을 안 했지. 아무래도 공주들의 결혼과 왕위 후계가 맞물린 문제라서?

- 그러면 왕권이 약한가?


물론 공주들  하나가 왕이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게 얼마나 어려웠던가 (지금도) 안다. 마틸다(1102-1167) 보라. 헨리 1세가 얘랑  남편, 땅땅! 하고 죽었는데도 블루아의 스티븐이며 다들 달려 나왔잖은가.



공주들은 구두 바닥이 밤마다  이렇게 닳는지 자기들도 모른다고 하고, 왕은 결국 공주들의 무도화 바닥과 밤의 비밀을 밝히는 자에게 공주들   명과 결혼하여 왕위를 이을 권리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런. 공주들 진짜 수난이다. 취미생활(?)도 방해하고, 권리도 앗아가며, 이제는 트로피 취급까지. 어쩌면 이건 왕과 귀족들 사이의 왕위 계승권을 건 정치적인 다툼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다가 결국 누구든 도전할 수 있게 해 줄 테니 해봐, 라는 걸까.


The Twelve Dancing Princesses, illustrated by Errol Le Cain


당연하겠지만, 공주들의 비밀에는 마법이 함께 한다. 공주들은 한 밤중, 모두가 조용히 잠들면 아름답게 치장하고 비밀의 문을 통해 마법이 걸린 지하세계로 향한다. 보석나무의 숲을 지나 호수를 건너 파티장(?)에 도착한 공주들은 아름답게 치장한 왕자(추정)들과 밤새도록 춤을 추고 새벽이 오면 다시 돌아 나온다.




영국의 옛 이름인 알비온 Albion은 알비나 Albina에서 따온 것이다. 알비나와 그녀의 자매들 (모두 30명!)은 시리아의 공주들이었다. 그녀들의 아버지인 왕은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강력한 왕이었다. 공주들은 강한 왕의 딸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스스로도 권력을 원한다. 그런 공주들에게는 오만하다, 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결국 공주들은 아버지의 신하들 - 귀족들 - 과 결혼하지만 분노하며 남편들을 살해하려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마음 약한(?) 막내 공주의 배신으로 발각되고 분노한 왕은 공주들을 배에 태워 바다로 추방한다. 29명의 공주들은 겨우 겨우 살아남아 도착한 섬을 알비온이라 이름 짓는다.




알비나와 그녀의 자매들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 <아더왕 이야기>에서 처음 읽었을 거다. <열두 명의 춤추는 공주들>에서 알비나가 떠올라서 작년에 나온 <Storyland>를 찾아봤다. 영국(연합왕국 NOT England!)의 옛 이야기들을 모아 편집, 정리하고 작가 Amy Jeffs가 주석을 달았다. 작년에 서점마다 두두둥하고 홍보할 때는 시큰둥했는데… 알비나 이야기는 당연히 있겠지 하며, 옆동네 서점에 마침 최근에 나온 Amy Jeffs의 신간 Wild와 이 책의 사인본이 있기에 두 권 다 샀다(...).



이야기하는 사람이 달라서일까, 아니면 내가 달라져서 일까.


예전에 알비나와 29명의 공주들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그 공주들이 오만하며, 죄 없는 남편들을 권력을 탐하여 살해하려고 했던 사악한 자들이라 받아들였던 것 같은데.


Amy Jeffs의 버전을 읽으면서

- 그토록 강력한 권력을 가진 왕의 자식인데 공주들이 바란 것은 그녀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권한이지 않은가.

- 얘네가 왕자들이었으면 오만하다고 평가받지도 않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Storyland>에는 알비나와 그 자매들이 오만하다는 묘사/평가조차 없다! 공주들의 결혼은 어쩌면 그녀들과 귀족들 사이의 정치싸움에서 공주들이 졌기 때문이 아닐까. 공주들이 남편들에게서 받은 처우 - <Storyland>에서는 공주들이 노예와 다를 바 없는 대접을 받았다고 언급한다 - 는 생략된 부분이 상당히 많은, 잔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막내 공주는 정말로 마음이 약해서 언니들을 배신했을까.




아직 결혼하지 않은, 하지만 진열장의 트로피가 되는 수모를 겪고 있는 춤추는 공주들은 어떤 결정을 할까.


공주들이 밤마다 춤을 추러 가는 무도회장(?)은 여러 모로 쓸모가 있어 보인다. 공주들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범위에 따라 다르겠지만. 무슨 일이든 꾸밀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남의 눈을 피해 반란이나 혁명을 도모한다던가, 마법으로 귀족이나 다른 나라의 왕자들의 불러 - 그들은 꿈을 꿨을 뿐이라고 생각할지도 - 정보를 모을 수 도 있을 것이고, 협력을 구할 수도 있겠지. 심지어 보석나무 가지 (숲!)도 있는데. 여기 혁명자금이 나무에 열려있습니다.




동화에서는 숲에서 만난 노파에게 친절을 베푸는 정도의 선함을 지닌 나이 든 병사가 눈에 보이지 않게 가려주는 망토를 얻어 결국 공주들의 비밀을 밝혀내고 첫째 공주와 결혼하여 왕위를 잇는다. 공주들은 이 결말에 만족할까.


어쨌든 나는 아니다. 그래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병사가 비밀을 밝혀내는 장면도 반란 계획의 일부 라면 어떨까 (일종의 신호 같은 ?). 허수아비 왕으로 병사를 내세우고 첫째 공주가 결국 권력을 쥐고 허수아비는 목이 달아나게 되었습니다, 라던가. 아니면 병사도 나름 계획의 일부가  수도 있겠지.




어떤 식으로 되었던, 열두 명의 공주 모두 자신들의 삶을 살았으면 한다.


The Twelve Dancing Princesses, illustrated by Errol Le Cain. 공주들이 오지 않아 시무룩한 왕자들.

Storyland A new mythology of Britain, Amy Jeffs, riverrun

The Twelve Dancing Princesses, illustrated by Errol Le Cain, retold from a stroy by the Brother Grimm, Puffin Books

아더왕 이야기 1권, 장 마르칼, 뮈토스 (구판)


삽화는 Errol Le Cain의 삽화를 소장한 <The Twelve Dancing Princesses>에서 촬영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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