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민지 Aug 19. 2020

달리기

한때 제일 잘했던 것.

"고장 난 사람이야 난.” 내면으로 되뇌던 의문이자 외면하고 싶던 두려움이었다. 나만 아는 비밀인데,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모두에게 들켜버릴 것 같아 차마 끌어올릴 수 없던 말과 마음. 그걸 결국 자포자기하듯 그의 차 조수석 안에서 뱉어버린다. 몇 시쯤 됐을까. 밤. 여름.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데, 꼴이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시든 풀 같다. 사랑받고 싶다는 그에게 차마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는 체격이 다부지고 말투가 온화한 사람. 나 보다 몇 살이나 어리면서 내게 아이 같고, 아기 같다는 부끄러운 말을 서슴없이 사람. 질문이 많은 사람. 기억력이 좋은 사람. 피곤하지 않은 사람. 날 종일 기다리는 사람. 사랑보다 이별을 먼저 준비하는 나를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 그럼에도 말을, 사랑을, 싸움을 시도 때도 없이 거는 사람. 저렇게 마음을 다 털어 보여주다니. 필시 사랑을 해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무모할 수야 없을 거라고도.

“왜 그런 말을 해.” 내 뺨을 크고 두꺼운 손으로 감싸 어루만지면서 그가 말한다. 따뜻해서 눈을 감고 싶었다. 그의 몸은 꼭 활활 불타고 있는 것 같다. 언제라도 금방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때문에, 그와 산책이라도 하기라도  하면 그의 옷이 땀에 다 젖어버리진 않을까 흘끔흘끔 쳐다봐야 한다. 그가 날 안으면 아이러니하게도 나 자신의 냉기에 되려 놀란다. 대리석 표면이나 혹은 피부가 뜨거워질 일이 없는 한 마리 뱀 같다고 스스로 느낀다. “차가워.” 그가 말한다. 몸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차가운 사람. 냉정한 사람. 현실적인 사람. 부정적인 사람. 말이 없고 대답을 피하는 사람. 그가 내게 했던 말들(이쯤 되면 이런 사람인 나를 만나는 그가 더 이상할 정도다). 정말 그런 사람일까. 손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타인보다 낯선 사람의 손. 아마도 틀림없이 고장 났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빈 껍데기뿐만은 아닐 거라고. 내 상처가 곧 그의 상처가 될까 미안하고 걱정이 든다. 불공평한 일이다.

그를 보고 있음 기분이 묘하다.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그 사람 위로 내가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5년 전의 나.

연인을 만나러 갈 때 한 번도 걸어간 적이 없었다. 늘 달렸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가, 그에게 향하는 길이 다 러닝 트랙이었다. 1초라도 빨리 보고 싶었고, 1초라도 더 오래 보고 싶었다. 마음이 급했다. 걷는 속도는 성에 차지 않았다. 4년 내내. 버스에서 내려서 뛰고, 택시에서 내려서 뛰고, 신사동 고개에 있던 회사에서부터 뛸 때도 있었다. 그의 얼굴이 보이기도 전에 숨이 차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래도 지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걸까. 그보다, 다시 달릴 수는 있을까.

분명한 건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분명한 건 오늘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제 사랑을 말하던 연인이 오늘 곁을 떠나는 것처럼, 오늘 타인인 그에게 내일은 마음을 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내겐 오늘이 늘 마지막 같다. 내일을 미끼 삼아 누굴 붙잡는 일만은 하고 싶지 않다.

가짜 마음을 받았더라면 나도 가짜 마음을 주었을 텐데. 진짜 마음을 받아서 줄 수 있는 게 없다. 위로 향한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아직 빈손이야.


cover: Egon Schiele.

작가의 이전글 듣고 싶은 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