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이별
코로나가 우리를 덮은 지 언 2년 하고도 3개월.
뉴스에서만 나오던 이야기가 내 삶 가까이 다가왔음을 더없이 실감하는 요즘이다.
아이 낳고 27개월이 지났을 때는 아이와 사는 세상에 완전한 적응을 했을 즈음이다. 나도 코로나와 같이 살아가는 삶에 어디쯤 적응했을까.
저녁에 주문하면 아침에 배달되는 갖가지 식자재들.
아무도 없는 식당에 들어가야 밥맛이 느껴지는 내 미각.
립스틱보다 마스크 신상에 더 눈길이 가는 내 쇼핑의 취향.
집에 초대하지도, 갈 생각도 없이 길에서 수다 떠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만남들.
어느새 나는 뉴노멀 시대에 적응해가는 뉴노멀 휴먼이 되어가는가 싶다.
하지만 좀처럼 적응할 수 없는 게 있다.
그건 바로 가까운 이들의 부고다.
상상하지 못했던 죽음도 있었고, 보다 빨라진 죽음도 있었다. 모든 죽음이 다 아쉽고 슬픈 것은 당연지사지만 유독 코로나 시대의 이별은 마음이 더 아프다. 조심하느라 서로 보지도 못한 채, 눈길 한번 못 마주친 채, 손 한번 못 잡은 채 우리는 마지막을 맞이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별의 절차 또한 너무 간소화되거나 생략되기도 한다.
백 년을 산 우리 할머니는 간병인과의 접촉으로 코로나에 걸리셨다. 그토록 조심하느라 노인정에도, 병원에도 잘 가지 않으시던 할머니였는데. 얼마 전 만난 명절에도 한 세대쯤 차이나는 손주와 손인사를 나누느라 버선발로 집 앞 현관까지 나오셨는데.
생명이 이토록 한 순간에 사그라드는 것인 줄 알면서도, 이별하고서야 우리는 이별을 안다.
그 만남이 마지막이었음을, 더 이상 이 삶에서는 우리 만나지 못함을, 보지 못함으로써 확인한다. 그리고 그제야 남는 후회와 미련들이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누구를 탓한들, 이 나라를 탓한들, 시대를 탓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떠나는 사람을 잘 보내는 것이 지금 남아있는 이들이 충실히 할 일이다.
"엄마, 잠깐이라도 가야지."
"코로나도 심각한데... 잠깐 왔다 가."
기차를 타고 마지막 인사를 힘차게 나누었던 다섯 살 아들과 함께 할머니에게로 간다. 오랫동안 함께 했던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유년시절이 자꾸만 기억이 나서 창밖의 풍경을 배경 삼아 눈물을 흘린다. 아이는 어느새 이렇게 컸는지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한다.
"엄마, 왕할머니 하늘나라 가셔서 그래?"
뉴스에서 보던 소식대로, 화장장이 없어 3일장이 7일장이 되었다. 그나마 할머니는 병원에서 돌아가셔서 다행이었다고 사람들은 위로를 건넨다. 백 살의 삶 동안 참 많은 자식과 손주들 뿐만 아니라 친구도 많고 챙기던 이웃들도 많던 우리 할머니는 가족 외에는 조문 없이 정말로 담백하고 소박한 장례를 치렀다.
'할머니, 죄송해요. 자주 찾아보지도 못하고. 너무 외로우셨죠. 정말 미안해요.'
기세 등등하게 손주더러 조용히 좀 하라고 소리치시던 할머니의 화끈한 호통이 기억나 웃음이 난다.
결혼하고 나서 줄줄이 이어진 이별에 통 못 보던 사촌들도 만나고 할머니의 유산으로 남겨진 생명들이 졸졸이 장례식에 모였다. 그리고 할머니는 없는 땅에서 할머니를 기억하고 울다가 웃다가 또다시 고요해진다.
길어진 장례식 덕분에 오래도록 할머니를 기렸지만 그 덕분에 정작 중요한 날에는 찾아가서 배웅을 하지도 못했던 시집간 세 번째 손녀.
삭혔던 감정이 북받쳐 밥을 짓다가 울다가 멈추어 글을 쓴다.
지금 이 혼돈의 시기에도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떠난다. 태어나는 것도 떠나는 것도 몇 겹은 더 조심스럽고 안타까운 조용한 이 시기. 나도 처음 겪는 코로나의 시대다.
그리고 나는 코로나가 시작된 후 세 번째 이별을 하였다.
아이의 말처럼 이제는 마음속에 있는 할머니를 언제나 기억하며 또 변해가는 삶을 충실히 살아야겠다.
할머니. 부디 이제 편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