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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울 Apr 04. 2021

비가 오니까 네게 편지를 쓰지



"비가 오니까 네가 생각나서."



 드라마 속 오글거리는 대사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나이쯤 되어보니 그런 고백을 듣던 짜릿한 순간이 참으로 그립다. 그립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도 아줌마가 되었기에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도도한 아가씨'인 척하던 시절에는 좋아해도 좋아하지 않는 척, 보고 싶어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척하는 게 정답인 줄 알았다. 누군가의 애를 타게 하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 줄은 가늠하지 못했기에 누군가의 마음에 쉽게도 흠집을 내기도 했다. 점점 나이가 먹어가면서 그것이 오답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답도 오답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은 내 마음이 내키는 데로 하는 것이 후회가 없다. 그러니까 '척'하느라 보낸 세월은 결국 '척'하지 않기 위한 수업인 셈이다.



 감정을 제어할 줄 알아야 성숙하다고 생각했던 시절에는 나의 감정을 숨기느라 참 애썼다. 이루어지는 사랑만이 남는다고 믿었다. 활짝 핀 꽃만이 눈에 보였나 보다. 하지만 살아보니 피다 만 꽃도 참 아름다웠다. 아프게 얼룩진 첫사랑도, 말 한번 시원하게 못해본 짝사랑도, 그 나름대로 사랑스러운 사랑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안다. 사랑은 이루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한다. 

그뿐이다. 



 이 무슨 비 오는 날에 오글거림이냐만은, '비가 오니까 네 생각이 난다.'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믿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나 또한 몰랐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은 며칠 전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보고 싶은 친구로부터이다. 연필로 쓴 엇나간 글씨들을 지우개로 지운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편지가 앙증맞다. 한눈에 보아도 참 그녀답다. 그리 길지도 않고 너무 짧지도 않은 작은 편지지 한 장에 딱 맞게 들어간 글자들이 이렇게 말했다. 


'네가 생각나네!'



 지금은 멀리 떨어져 볼 수 없는 친구의 고민과 떨림, 그리고 그리움이 담긴 편지는 내 눈을 타고 세상에 나왔다가 다시 하이얀 봉투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 존재의 여운은 오래도록 남았다. 세찬 비와 짙은 천둥이 창문을 두드린 밤이 지나가자 편지의 여운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는 듯 터져 나왔다. 편지지를 꺼내어 앉은자리에서 한 장 한 장 편지를 쓰다 보니 고새 다섯 장째 편지를 쓰고 있었다. 뻐근한 손목을 몇 번이고 돌려가며 마무리를 짓고 읽어보자니 웃음이 나온다. 웃음이 나올 수밖에. 참으로 유치하기도 하고 참으로 나답기도 하다. 소소한 이야깃거리들을 빼곡히 적은 내 편지도 그녀의 눈을 거쳐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이 되겠지.


'네가 그립다.'








 비가 오는 날에는 편지 쓰기가 좋다. 아니 천둥이며 빗소리며 다 핑계일지 모른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고백할 때를 기다린다. 우리는 사랑할 시간을 기다린다. 언젠가, 타이밍이 좋으면, 그럴 기분이 들면, 보고픈 이에게 전화를 하고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쓰며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기약도 없이 비가 오는 날을, 꽃이 피는 날을 기다리는지 모른다. 나 또한 내 삶을 통틀어 그렇게 살아왔으니 말이다.



 이루어야만 대단한 사랑이라면, 우리는 그 크고 완전한 사랑에 결코 범접하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평범한 나는 그렇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오늘 그대와 차 한잔 하기, 오늘 그대에게 편지를 쓰기, 오늘 그대에게 고맙다고 말하기.

오늘 당장 너를 대화로 초대하고 너의 대화에 응답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그까짓 거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심오한 사랑과 삶을 살기엔, 비가 내려 땅에 떨어지는 찰나보다도 재빠른 것이 시간임을 아니까 말이다.

 


 아줌마가 되고 보니 가끔은 주책맞은 용기도 생긴다. 하고픈 말, 오글거리는 고백도 뱉어버리면 그만이다. 험담이나 비판이 아닌 사랑고백이라면 남을 아프게 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조금은 쑥스러워도 이렇게 말하면 그만이다.

"비가 오니까."

괜한 날씨 핑계를 대는 것쯤 또 어떤가?

날씨 핑계 대기 좋은 시절이다. 꽃이 펴서, 꽃이 져서, 여름이 오기 전에, 바다가 예뻐서. 

아무거나 막 갖다 붙여놓아도 어색하지 않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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