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즘 읽는 책에서 나오는 첫 번째 조언이 '버텨라'이다. 버티기에서 연상되는 말은 인내심 기르기, 고통을 이겨내기 등이 있다. 삶의 많은 영역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자신의 역량을 키우며 버틴 사람들이 결국 다른 이들에게 기억되는 성공하는 자가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10명의 손주를 앉혀놓고 말씀하신 것이 있다. 언제나 같은 내용이었다.
"내가 성당은 잘 안 나가지만, 이것 하나는 정말 맞는 말이야. 할아버지 말하는 게 맞는지 들어보세요."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슬기를 낳고, 슬기는 희망을 낳는다.
100세까지 사신 할아버지는 전 삶은 통해 인내를 가르쳐 주셨다. 인내하는 삶, 자신을 절제하는 삶으로 우리 손주들 마음속에 큰 교훈을 주셨다. 말수가 없으신 할아버지가 늘 이야기하시던 이 글귀를 읊어주시며 덧붙인 한마디가 귀에 맴돈다.
"할아버지는 이 말이 참말인 것을 믿는다."
나도 책 속에서 발견한 이 '버티기'에 밑줄을 긋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 버텨야 살 아이들
그런데 이 버티기가 불가능 한 아이들이 있다. 자꾸만 나를 분노에 들끓게 하는 사건들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생후 2주 된 아이를 20대 부모가 숨지게 한 사건, 초등학생 조카를 고문해 숨지게 한 사건, 어린이집에서 장애아동을 돌보는 교사들이 아이들을 학대한 사건 등. 지금 사회 곳곳에서 발생하는 실제 사건들이다.
나는 원래 아동학대 사건은 되도록 보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보다 아이가 어릴 때는 그런 낌새만 보이는 뉴스라 치면 재빨리 다른 채널로 돌렸다. 폭행의 잔상이 남아 하루 종일 그 아이를 떠올리곤 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뿐만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 혹은 평범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장면과 묘사는 견디기 힘든 것이다. 그 아이들은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이다. 전혀 방어할 힘도, 의지도 없는 그저 사랑이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들이 가장 사랑을 기대한 이들에게 당하는 고통은 보기가 힘들다. 보고 싶지도 않다.
얼마 전 세상 엄마들을 다 분노케 한 입양아동에 대한 아동학대사건이 터졌다. 그 사건의 결말이 채 맺어지기도 전인 지금, 여전히 속속들이 끔찍한 아동학대사건이 들려온다. 언제까지 이 뉴스들을 나는 외면할 수 있을까? 슬프고 아프고, 무엇보다 너무나 외로운 아이들의 말할 수 없는 눈길이 보지 않아도 보이는 듯해서 도저히 오늘은 책의 한 줄에 집중할 수가 없는 날이다.
'버티라'는 이 말이, '고통은 결국 달다'라는 이 조언이 통용되지 않는 세상, 그곳은 바로 가정폭력, 아동학대가 일어나는 가장 은밀한 장소, 가정이다.
나는 우리 집 이야기를 자주 쓴다. 근엄한 아빠, 희생적인 엄마, 셋째 딸이라는 운명을 타고나서 나름 손해보고 그래도 따스하고 사랑했노라고 나는 우리 가족을 종종 글감으로 올려놓곤 한다. 그렇다. 사실 지나고 보면 나의 역사가 숨 쉬는 가정이라는 곳은 대게 안락한 곳으로 추억이 된다. 그 추억에는 완벽하진 않아도 최선을 다한 부모의 모습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소리 없이 스며들어 나를 물들게 하고 그 사랑 안에 나의 가치를 발견한다. 나는 사랑받고, 그리고 나는 사랑한다.
그러나 그 안락해야 할 가정에서 어떤 아이들은, 방어할 수 없는 폭력 앞에 무력하다. 아이들의 존재는 그저 한 어른의 분노 앞에 꺼질 수도 있는 운명인 것이다. 보호해야 할 생명을 자신의 기분 탓으로 '후' 불어놓고도 자신의 죄를 덮을 생각만 하는 양육자, 그들은 어떠한 죗값을 받아도 용서받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이들은 버티지 말아야 했다. 아니 우리가 그들을 다른 세상으로 데리고 나와야 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가장 큰 미안함과 분노를 느낀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들
우연히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다큐[엄마라는 이름으로 - 광주 영아 일시 보호소 72시간]를 보게 되었다. 삼일에 걸쳐 영아 일시 보호소의 생활을 취재한 내용이었다. 그곳 아이들의 모습, 그리고 그곳에 맡길 수밖에 없는 부모의 마음이 안타끼웠다. 무엇보다도 내게 감동을 준 것은 임시보호소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선생님들이었다. '임시 엄마'이지만 진짜 엄마처럼, 아이들의 앞날을 걱정하고 제대로 자지도 못함에도 지친 기색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갓 태어난 아기는 너무나 예쁘지만, 그만큼 희생과 사랑을 필요로 한다. 완전한 사랑과온전한 돌봄이 필요한 시기의 아이들의 엄마를 자처한 그들이 대단해보였다.
나를 눈물짓게 한 선생님의 한마디,
"정말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하거든요."
다큐 "엄마라는 이름으로 - 광주 영아 일시 보호소 72시간(KBS 090606 방송)"
자꾸만 들려오는 절망적인 뉴스에도 내가 기억하는 다큐에서의 세상은 이토록 아름답다. 물론 그곳 아이들의 삶이 순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우리 삶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대가 없는 사랑을 지불하기도 한다.
결국은 나에게 하는 말, 버텨라!
그들의 죗값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그들의 만행에 분노하던 나는, 그것이 사실 나의 무력감에 대한 분노이기도 한 줄 안다. 나는 한 때 비영리 아동복지 재단에서 후원 업무를 맡아하고 있었다. 광고홍보대행사로 입사를 희망하던 많은 선후배와 달리 나는 아이들을 위한 비영리기관에서 일하고 싶었고 그 소망을 이루었다. 홍보일만을 하던 나는 내가 생각하던 비전을 찾지 못했다고 생각했고 퇴사를 결심했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나는, 나의 소망을 이루었을까?...
'버티라'는 조언을 해야 할 대상은 아이들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상처 난 '부모들'에게 해야 할 말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지치지 말라고 그 길에서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10년 전 나'에게 해야 할 말이다. 조금은 어려운 글이었다. 어제오늘 묵혀두며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생각하고 생각했다.
왜 버티기라는 말에서 아이들을 떠올렸으며 한 다큐를 돌아 나 자신에게 그 말이 돌아왔을까?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쉽다고 누가 말했나?
부모가 되는 일이 행복하기만 한 일이라고 누가 말했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가시밭길이다. 내가 신은 신발에 양말마저 벗어던져야 걸을 수 있는 고된 길임을 살아보지 않고 알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일에서 행복을 찾는 다면 우리는 더 이상 길을 헤매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 의미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무의미한 세상에 분노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랑을 주지 않는다고 분노할 일도 없을 것이다. 제대로 사랑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사실 이 말은 내게 하는 말이다.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나에게!
사랑하는 일에서 '버티자'! 나를, 가족을, 그리고 지금 나를 분노케 하는 저 고통받은 아이들을.
어쩌면 오래전 그만둔 나의 꿈이 또 다르게 길을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외면했던 것은 아이들의 고통이 아니라 어쩌면 다시 꿈틀거리는 나의 사명인지 모르겠다. 아직 길은 모른다.
그러나 외면하지 말기로 결심한 지금부터 그 길은 저절로 생기리라 믿는다.
<함께 보면 좋을 영상>
짧은 시간, 영원히 남는 기억 - 영아 일시 보호소 | “엄마라는 이름으로 - 광주 영아 일시 보호소 72시간” (KBS 090606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