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come closer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지울 Feb 13. 2021

뜨거운 설날

줌으로 세배를 한다고?

영영 못 만나는 게 아니잖아


 나의 생애에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을까? 내 아이가 컴퓨터를 보며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고 새배를 드릴 날이 올 줄 알았을까? 언젠가, 한 20년쯤 후에나 있을 줄 알았던 '미래'의 일들이 나의 일상, 나의 눈 앞에서 구현되고 있음이 신기할 뿐이다. 이번 설날은 시작부터 참 서글펐다. 대가족인 우리 친정은 한 달 전부터 이 문제에 관해 논의를 해왔다.

"언니, 이번에 어떻게 할 거야?"

"아, 모르겠어... 이럴 때는 누가 좀 정해주면 좋겠다."

'모르겠다'를 연발하던 맏언니가 결국 총대를 매고 조정에 들어갔다. 설을 일주일 앞두고 우리는 한집만 가기로, 그것도 대표들만 가기로 정했다. 고등학생이 되는 조카를 공부시키느라 친정나들이가 뜸했던 큰언니가 이번에는 가기로 하고서 나는 생각했다.

"어차피 잘됐어, 짧은 연휴에 기차 타고 내려가면서 고생하고, 불안해하며 만나느니 안 가는 게 낫지."

그래 안전이 최고다. 그건 확실하다.

'그런데 나는 이번 설날을 어떻게 보내지?'


어쩌면 변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설날 당일, 홀로 계신 시어머니를 뵙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허전했다. '예년 같으면...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쩌면 예년 같은 세상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지금 이 위기는 사라지겠지만, 설 연휴 꼬박 사촌들이랑 엄마가 사주신 새 옷을 입고 할아버지 동네를 누비던 날이 더 이상 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추억이 되었다. 나는 그런 시절을 살았고, 아이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명절을 살아갈지 모른다. 사람들의 생각보다 세상은 한참을 빨리 달려갔다.

 나는 핸드폰이 뭔지 모르는 학창 시절을 보냈고, 세돌 아이는 핸드폰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임을 알고 있다. 나는 짜장면 한 그릇 배달시켜 먹는 날을 일기장에 기록했고, 내 아이는 초인종 소리가 들리면 귀신같이 피자가 온 것을 알아맞힌다. 나와 아버지 세대가 달랐듯, 우리 아이와 나의 세대도 다른 것은 당연지사겠지만, 그 변화는 더욱 획기적이고, 더욱 예상 불가하다.

나도 이 세상을 아등바등 배워가고, 아이는 이런 세상을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도 뜨거운 설날


 지난 1년간 다시 가족과 와인잔을 기울일 그 날을 고대하면서도, 어느덧 나도 이렇게 변한 세상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줄지 않는 이 그리움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요양원에 계신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호소하는 신문기사는 더욱 나를 안타깝게 한다. '살다 살다 이런 설은 처음'이라며, 못내 속내를 비치시는 아빠의 말이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손주의 "보고 싶어요, 할비." 이 한마디는 또 전화기 너머의 아빠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래, 누군가의 말처럼 못 볼 것도 아니고 언제든 안전해지면 모이면 되지.

그러나 우리가 그간 더 커져버린 사랑과 그리움은 어찌하면 좋을까?

 왠지 센티해지는 설날의 저녁, 조카의 전화에 마음이 바빠졌다.

"이모! 지금 곧 줌에서 만나 세배할 거예요. 어서 들어와요."

설거지를 서두르며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번개맨 옷을 입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8시 정각, 우리는 모두를 바라보았다. 그새 많이 자란 조카들, 그리운 엄마의 얼굴, 환한 아빠의 얼굴... 모두 참 반갑다. 온라인 세배를 드리고 덕담도 나눈 뒤 이제 그만 헤어지기로 하자 아들내미가 섭섭해하고 만다.

"아냐! 더 할 거야!"

이제 세 번째 온라인 만남에 제법 익숙해졌는지 형아와 누나와 이야기도 곧잘 나눈다. 누군가의 얼굴을 스크린을 통해 바라보고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이제 엄마인 나보다 익숙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연신 장난을 거는 아이의 뒷모습이 참 귀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도 뜨거운 설날 밤을 보냈다.



지구가 아픈 만큼 기술도 진보하고, 기술이 진보하는 만큼 지구는 아프다.
이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머리를 틀기 위해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할까?

 

 어릴 적 할아버지 할머니 집 앞을 걷노라면 노랑, 빨강 형형색색의 색동 한복을 입고 만화책을 빌리러 가던 또래의 아이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이상하게 오늘 그 풍경이 너무나 선명하게 생각난다. 그 아이들은 나와 같이 나이가 먹었을 테지? 그때의 그들도 이처럼 변한 세상에 적응하며, 이 세상의 반이 디지털인 줄 아는 자신의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겠지? 어쩌면 이미 나의 세대도 저물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 곧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내 아이들의 세대들 뒤로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작고 큰 생각들 뒤로, 단 하나의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가 어쩌면 무거운 짐처럼 여겼던 그 평범한 날들이 얼마나 소중한가!

우리가 무심코 함께 하던 그날, 우리가 늘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그날들 말이다. 어쩌면 앞으로 무대를 환히 밝힐 아이들이 그런 날들을 살아나갈 있도록 돕는 것이, 그런 날을 무심코 지나온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렇게 뜨거운 설날이 지나간다.

우리 다음에는 뜨겁게 만날 수 있기를. 그때까지 모두 건강하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에게는 증명하지 않아도 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