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면 열심히 했고, 잘하라고 하면 잘했다. 특목고에 진학한 뒤에도 그냥 열심히 했더니 잘하는 아이가 되었고, 고3 때도 매번은 아니었지만 꽤 자주 1등을 했다.
그래서 내가 수능을 망쳤다는 사실을 모르는 선생님이 없었고, 다행히 논술 수시에 합격했을 때도 친구 엄마에게 '서울대에 못 가는 게 아까우니 재수를 해보는 게 어떠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덕분에 나는, 내가 조금은 더 대단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나는, 내일이 월요일이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앞에서는 생글거리지만 뒤에서는 불만하는 회사원이 되었다. 내 인생을 내 손에 못 쥐고 휘적휘적 끌려다니는 어른이 되었다.
내 장래희망은 글쟁이였다. 장래희망을 꿈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언론학과나 사회학과에 진학하고 싶었고, 글을 쓰고 싶었고, 기자나 작가가 된 내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문제는 내가, 무얼 하든 '보통 이상은'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것을 해도 못하기는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뭘 해도 나쁘지는 않게 해내는 거다. 그래서 나는 잘하는 일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려 해왔다. 잘한다는 말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하니까. 잘하는 걸 좋아한다고 해버리면 속 편하니까. 지금 하는 일도 결국 숫자 다루는 일을 '보통 이상은' 해서, 좋아한다고 우겨서, 하게 된 일이다.
가끔 상상을 한다. 내가 글쓰기를 빼고는 몽땅 보통에도 못 미쳤다면, 지금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물론 글을 또 그렇게 잘 쓰는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글을 쓸 수밖에 없으니 지금쯤 '글쟁이'가 되었을까?
엄청나게 잘하는 건 어렵지만 '보통 이상'만 하는 건 쉬워서, 나는 쉽게 도망쳐 다녔다. 좋아하는 일을 엄청나게 잘 할 자신이 없으면 '보통 이상은' 하는 걸 좋아한다고 우기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도망치다보니 지금 여기에 도착했다. 불만 가득한 곳. 아침에 눈 뜨기가 걱정돼서 잠 못 드는 곳.
안녕하세요 작가님!
으로 시작하는 작가 승인 메일을 받은 지금이 회사에서 중요한 보고를 무사히 마쳤을 때보다 행복하다. 월요일을 회식으로 시작했는데도, 점심을 못 먹었는데도, 괜찮다.
요즘 나는 기로에 서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적당히 잘해서 좋아하는 척만 하면 되는 일과, 좋아해서 고생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 사이에 서있다는 느낌.
오늘은 좋아하는 일을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내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