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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Feb 24. 2016

할머니와 목욕


나는 외할머니 손에 컸다. 엄마가 안 계신 것도 아니었고,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릴 때 할머니랑 살았었다.


3살 쯤 되었으려나. 그 때의 나는 요구르트를 너무 좋아해서 자다가도 일어나서 요구르트를 찾았다. 그러면 할머니는 나를 들쳐 업고 골목 끝에 있는 슈퍼로 달려 갔다. 그리고는 슈퍼 안 쪽방에서 자고 있는 아줌마를 깨워서 요구르트를 사줬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요구르트 하나를 쭉 빨아마시고 다시 잠이 들곤 했다.


조금 더 커서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방학이 되면 동생이랑 진주 외갓집에 가서 지냈다. 엄마가 버스 터미널에서 우리를 태워보내면, 할머니가 버스 터미널에 나와서 우리를 데려갔다. 그렇게 진주에 가있으면 할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백숙도 해주고, 피자도 해주고, 시내에 데리고 나가서 파파이스 비스켓도 사줬다. 나는 할머니 냄새가 나는 이불 위에 앉아서 할머니가 뜯어주는 닭다리를 먹는 게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너무 좋았다.


대학생이 된 나는 서울로 왔고, 그 해 5월에는 할머니도 올라오셨다. 서울로 오시게 된 건 사실 나 때문이 아니지만, 어쨌든 여러가지 이유로 나는 다시 할머니와 같이 살게 되었다.






우리는 예전과 달랐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된 나는 부어라 마셔라 놀아야 하는데 할머니는 밤늦게까지 나를 기다리고, 주말에도 친구들을 만나러 쏘다녀야 하는데 할머니는 집에서 통닭을 구워준다고 했다. 아침에는 밥맛이 요만큼도 없는데 꼭 고봉밥을 퍼주며 먹고 나가라고 했다. 할머니는 나에게 조금씩 귀찮은 사람이 되었다.


그러면 안 되는 줄 나는 알고 있었다. 할머니를 귀찮게 여기는 내가 얼마나 나쁜지도, 할머니가 연고도 없는 서울에 올라와서 얼마나 적적하실지도 다 알고 있었다. 그래, 시험만 끝나면. 그래, 취직만 하면. 원래 20대는 바쁜거니까. 생각하면서 가책을 조금이나마 덜어냈다.


4년이 지나 나는 졸업도 하고 취직도 했다. 지금도 할머니는 내가 야근을 해도, 회식을 해도, 집에서 기다린다. 나는 가끔 할머니를 모시고 외식하는 것으로, 동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돌체라떼 한 잔을 테이크아웃 해다 드리는 것으로, 예쁘다고 하신 가방 하나 사드리는 것으로 할머니를 위로한다. 할머니를 위로하는 척 사실은 자기위안한다.


졸업도 하고 취직도 했지만 나는 달라지지 않았다.


대신 나는 술을 진탕 마시면 엉엉 울면서 할머니한테 미안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항상 할머니를 기다리게 하는 사람 같아서. 후회하게 될까봐 무서워서. 그러면 할머니는 내 외투를 벗겨주며 뭐가 그렇게 서럽냐고 웃었다.






토요일에 할머니와 목욕을 갔다. 2년 만이거나, 더 오랜만인 것 같다. 아마 태어나서 처음 간 목욕탕도 할머니랑 갔을텐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할머니 등을 밀어드렸다. 나이가 드시니 살이 물러져서 때수건으로 등을 밀면 말랑한 살이 따라 올라 붙었다. 그래서 오래오래 등을 밀었다.


"할머니, 그 때 왜 할머니가 집에서 피자 만들어줬잖아. 그 빵 같은 피자. 토마토 소스 올라간 핫케익 같은 거."


"아이고 맞네. 근데 이제 우째 만드는 긴지 기억도 안 난다. 자꾸 해무야 알지, 안 해무면 어데 기억이 나나. 경아 니는 그런 거를 다 기억하네."






사람들은 나에게 너는 참 욕심이 많다고 말했었다. 착한 딸도 되고 싶고, 예쁜 손녀도 되고 싶고, 동생들에게도 잘하고 싶고, 친구들이랑도 남자친구랑도 잘 지내고 싶고. 피곤하지 않냐고, 적당히 놓고 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아마 할머니 쪽을 놓았나보다. 놓아도 멀어지지 않을 거니까. 내가 놓아도 할머니는 안 놓을 거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더 욕심을 부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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