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속도에 취했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뜬금없이 엄마 아빠한테 보고싶다고 문자를 보냈다. '무슨 일 있어?'라든지 '갑자기 왜 그래?'라고 물어올 줄 알았는데, 엄마는
주말에 내려 올래?
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저것 재는 나의 성격은 역시 어쩔 수가 없어서, 이틀만 내려가기는 아쉬우니 4월 회사 창립기념일과 주말을 붙여 내려가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왜 이렇게 반토막 짜리일까. 반토막 짜리 용기. 반토막 짜리 결심. 신중함을 빙자한 용기 없음. 하고 싶어도 당장 할 엄두는 못 내는 결단력 부족.
이 놈의 회사 관두고야 말겠다고 소리질러댄지 두 달이 지났는데 정작 내일이 삼일절이라는 사실에 그럭저럭 만족하는 나는, 그래, 나 쫄보 맞다!
지금껏 살면서 나보다 빨리빨리병이 심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빨리빨리병
인생의 모든 단계를 남들보다 빨리빨리 밟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정신병. 혹은 마음의 병.
일곱 살에 초등학교를 들어간 나는, 고3 때도 아무튼 간에 재수는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휩싸여 지냈다. 대학생 때도 별다른 이유 없이 휴학을 하는 건 엄청난 일인 줄 알았고, '칼졸업'을 못하면 인생이 꼬이는 줄 알았다. '칼취직'을 못하면 모두가 나를 비웃을 줄 알았다. 빨리빨리 못하고, 돌고 돌아서 하게 될까봐 무서웠다. 빨리 할 수 있는 걸 빨리 못하는 건 시간낭비니까.
인생은 속도보다 방향이라는 말이야 나도 수없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생각했다.
"아니, 천천히 한다고 그렇게 대단한 방향으로 가는 것도 아닌데, 빨리라도 가야지."
게다가 내 옆에는 나만큼이나 모든 걸 빨리 해온 남자친구가 있었다. 같은 시기에 취직한 우리는 입사했을 때 각자 스물셋, 스물다섯이었다. 어딜 가나 어쩜 이렇게 빨리 취직했냐는 말을 들었다. 그게 익숙했고,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뿌듯했다.
그러다보니 나는 속도에 집착하게 되었다. 남들보다 빨리 하지 못하면 초조했다. 남들과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면 더 빨리 뛰어가고 싶었다. 나는 앞서 가면서도 언젠가는 따라잡힐까봐 불안해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속도에 취했다.
그렇게 '해내야 하는 것들'을 급하게 해치우고 난 지금, 나는 이제 와서 아쉬워졌다. 그 때만 누릴 수 있었던 것들을 만끽하지 못한 것이. 왜 나는 방학 내내 집에 내려가 있었던 적도, 몇 달 쯤 여행을 간 적도, 별 이유 없이 휴학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린 적도 없었을까. 뭐가 그렇게 급해서. 조금 늦는 게 뭐가 어때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순간순간 나에게 집중했어야 했는데. 지금 보니 '빨리빨리'와 '돌고 돌아서'는 반댓말이 아니었다. 너무 빨리 와버리면 돌아가려고 마음 먹어도 쉽게 멈춰지지가 않아서, 결국 돌고 돌아서 가야 하니 말이다.
지금도 당장 짐 싸들고 집에 내려가지 못하는 나는 여전하다. 내 방 이불 속에는 주말 내내 글을 하나도 못 썼다는 조바심에 급히 발행 버튼을 누르는 내가 있다.
이게 다 관성 때문이다. 조금씩 늦춰가면 되겠지.